영국에 사니까
아들이 태어나던 때의 일이다.
바로 한 시간여 전만 해도, 남편이 친구를 만나러 간 사이 나는 인터넷 검색도 하고 친척과 친구에게 보낼 크리스마스 카드를 적으며 평온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임신 9개월에 접어들 무렵이라 언제든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고 남편에게 신신당부를 해둔 상태다. 어디서든 단박에 달려올 수 있도록 멀리 가지 말고 휴대폰도 꼭 끼고 있으라고.
그런데, 이슬이 비치고 양수가 새기 시작했다. 예정일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 참 난감한 일이다. 남편에게 전화했더니 친구랑 한잔하고 있다네.
평소에도, 술 못하는 아내를 대리운전기사로 내세우는 호사를 누리는 남편이지만 하필 이런 때 그러다니. 예정일이 한 달이나 남았다고 마음 놓은 모양이다.
다행히 근처 술집에 있어서 남편은 금방 도착했다.
영국의 겨울은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으면 일몰이 시작된다. 일찌감치 어두워진 도로를 따라 천천히 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뒤따르는 경찰차가 보였다. 경찰의 추격을 받을 만한 일은 안 했으니 '우리 차는 아니겠지'하고 계속 가려는데, 평소에도 한산한 도로가 이 날따라 더 황량했다. 도로 위 움직이는 물체라고는, 우리 차와 뒤따르는 경찰차뿐. 이토록 한산한 도로에서 경찰이 따라온다면 우리 차를 부르는 것이겠구나 싶어 곧바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운전이 미숙하던 시절, 검문을 받은 경험이 몇 차례 있던 나는 덤덤히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조수석에 있던 남편이 먼저 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의 미등 하나가 고장 났는지 불이 꺼져있다고 경찰이 지적했다.
검문 중 이런 지적을 받으면 정해진 기한 내에 수리를 마친 후 관할 경찰서로 가서 확인을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운전자의 신원과 자동차 정보를 현장에서 확인하는 과정도 거치고.
다급해진 남편은 차에 챙겨 두었던 내 산모 카드를 무작정 들고 가 경찰에게 보여주었다. 앞서와 같이, 아내의 양수가 터져 병원에 가는 길이라는 해명과 함께.
출산이 임박하다는 아내는 태연히 운전석에 앉아 바깥 동정을 살피고 있고, 남편이라는 작자는 불콰한 얼굴에 술 냄새마저 풍기며 경찰에 대응하고. 무엇보다 주행 중인 차를 불러 세웠으면 운전자가 나와야 할 일 아닌가. 이런 미덥지 않은 상황을 경찰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우리가 멈춰 서 있던 도로에서 모퉁이만 돌면 병원이 나오는 데다, 산모 카드를 들이대었으니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었겠지.
어떤 이유에서건 우리는 아무런 제지 없이 무사히 병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초보 부모는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
아무리 책이나 비디오를 활용해 틈틈이 공부하고 선배 부모에게 한수 배운다 하더라도 말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다 보면 실전에 임하기 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 할 난제가 때때로 발생한다. 내게는 출산 용어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웠다.
이슬?... 산욕?... 오로?...
개념이 모호하거나 아예 모르고 있던 단어라면 모국어로든 외국어로든 그 의미를 파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산고를 겪는 사람을 실제 지켜본 경험이 없던 내게 출산이라고 하면 드라마와 영화에서 본 장면이 전부다. 양수가 터지는 순간 견디기 힘든 고통을 호소하는 산모가 나오고 의료진이 급하게 둘러싸는 장면 말이다.
정작, 내가 임산부가 되고 보니 영화 장면과는 무관하게 상황이 전개되었다. 내 몸에서 물이 왕창 쏟아지지도 않았고 산통도 이어지지 않았다. 양수만 조금씩 흘러나왔을 뿐 통증은 없었다. 그 후로 6일이나 지나서야 출산을 했는데, 그 순간까지도 내게는 양수가 한꺼번에 터지는 일도 크게 고함을 질러야 할 정도의 통증도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관되게 '양수가 터졌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건 영화 속 장면처럼 출산을 앞둔 산모의 몸에서 물이 쏟아지는 현상이다. 태아를 보호하고 있던 양수가 흘러나오고 있으며 생명이 태어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다. 당장 분만에 대비해야 한다. 반면, 내가 경험한 건 단순히 양수가 새는 현상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렇게 표현했어야 한다.
임산부의 몸에서 물이 샌다면 죄다 양수가 터지는 걸로 인식했으니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내 양수가 새는 원인에 대해서는 병원에 있는 동안 그 누구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다만, 위험한 징후는 없으니 병원에서 지내며 조금이라도 예정일에 맞추어 시간을 끌어보자고 했다.
예정일이 한 달이나 남은 사람에게 병원에서 시간을 끌어보라고? 물론, 병원비가 무료라 돈 걱정을 한 건 아니지만, 중증 환자도 아닌데 한 달씩이나 병원에 있을 수 있겠는가?
수술복 차림의 한 중년 여성이 나를 보더니 반가이 맞이했다.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알지, 싶어 어리둥절해졌다.
주치의 제도가 있는 영국에서는 임신과 출산을 각기 다른 병원에서 담당한다. 임산부와 태아를 위한 산전 검사는 주치의 병원과 주치의가 지정하는 검사소에서, 출산과 산후 검사는 2차 의료기관인 종합병원에서 담당한다. 당장 애가 태어나는구나 싶어 우리 부부가 달려온 이곳은 바로 그 종합병원의 산부인과 병동이다. TV에 출연하는 유명인도 아닌 나를 이곳 사람들이 알아볼 까닭이 없다.
잠시 뒤 서로의 사연을 전해 들으면서 오해가 풀렸다.
마침, 중국인 임산부가 분만을 앞두고 있는데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통역사를 부른 상태라고 한다. 바로 그즈음 병원에 들어선 나를 그 통역사로 오해한 모양이다. 만삭임에도 배가 덜 불러 보이는 편이라, 먼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임산부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던 때다.
애타게 통역사를 기다리던 조산사가 이끄는 대로 얼떨결에 내가 따라갔더라면 낯선 분만실에서 말도 안 통하는 임산부와 마주 했을지도.
양수가 새는 걸 양수가 터졌다로 표현한 덕택에 도로 검문에 무사 통과되긴 했다만, 나의 무지한 발언을 듣고 병원에서는 상당히 긴장하고 나섰다. 통역사라는 오해는 풀었으나 여전히 나를 임산부가 아닌 방문객으로 착각하는 의료진에게 ...내가 임산부다... ...양수가 터졌다... ...출혈도 있다... ...예정일이 한 달이나 남았다... 라며 폭탄을 한꺼번에 터트렸으니 긴장하는 것도 당연하다.
만삭의 임산부가 눈여겨봐야 할 신체 현상인 이슬을 나는 영어로 몰랐다.
설마, 양희은의 노래에 나오는 그 이슬 (dew)은 아닐 테고.
그래서, 얼떨결에 출혈 (bleeding)이라고 했다. 피가 섞여 나오는 현상이니 나름 잘 해석했다 여기고 말이다. 사실, 이날 목격한 것도 어쩌면 이슬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곧바로 출산으로 이어지진 않았으니.
내가 헷갈려하거나 몰랐던 이런 출산 용어는, 우리 부부가 함께 읽고 있던 임신과 출산에 관한 안내서 마지막 단원에 나오는 대목이었다. 내 임신 단계에 맞춰 첫 단원부터 순서대로 나름 열심히 책을 읽어 나갔지만, 출산 일정이 갑자기 당겨지는 바람에 마지막 단원의 공부를 미처 시작하기도 전 시험장에 들어서고 만 것이다.
임산부의 이슬은
dew도 아니고
bleeding도 아니고
show임을 알지 못한 채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커버 이미지: Photo by Alicia Petresc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