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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그 황당한 추억 2

영국에 사니까

by 정숙진

“이제 막 36주가 지났으니 안전한 시기인 37주까지 버티는 편이...”


“양수가 새는데 계속 내버려 두면 태아에게 위험합니다. 당장 분만하는 편이...”


병원을 찾은 지 5일째 되는 날이다.


그동안 교대 근무가 이루어지면서 낯선 얼굴의 의료진이 매번 나타나 상충되는 의견을 내놓으며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양수 터짐은 출산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지만, 내 경우는 양수가 조금씩 새기만 할 뿐 아무런 출산 징후가 없었다. 어떻게든 예정일까지 기다리는 편이 낫다는 의견이 조금 더 앞서긴 했는데, 그렇다고 무한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평소에도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체질인데, 잠자리마저 달라진 상황에서 2~3시간마다 의료진이 나타나 내 몸에서 자궁수축도와 태아 맥박을 측정하니 제대로 잘 수가 없어서다.


바뀐 잠자리와 불안한 심경, 잦은 검진 외에도 숙면을 방해하는 요소는 하나 더 있었다. 처음엔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소량이던 양수 새는 상황이 급기야 산모용 기저귀로도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침대 시트가 젖어버리는 바람에 한밤중에 추워서 깨는 일도 발생했다.


결국, 예정일을 3주 앞두고 분만을 결심했다.


결정이 내려지자, 이른 아침부터 의료진이 내 침대 앞에 진을 치고 당장 유도분만에 나서기로 했다. 양수가 새기는 하지만 아직 태아에게도 내 몸에도 반응이 없으므로 인위적으로 분만을 유도해야 했다.


알약 형태의 유도분만제를 삼키고 반응을 기다렸지만 효과가 없기에 몸속에 주입하는 형태로 다시 시도한 후 무작정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이마저 약효가 떨어지는 4시간이 지나면 다시 약을 쓴다고 하는데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랫배가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제 당장 애가 태어나는구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진행이 길어졌다. 담당 의사가, 아직 자궁문이 많이 열리지 않았으니 오늘 하룻밤 자고 내일 오전에 출산에 대비하자고 나왔다. 유도분만제를 투입하고 그 반응을 기다리는 일만으로 20여 시간을 보낸 셈이다.


보통 때 같으면, 남편은 방문 시간이 지났으니 귀가해야 하지만 이미 분만이 시작된 셈이라 부부가 함께 지낼 수 있게 해 줬다. 내가 머물고 있던 유도분만실에서 나온 후 별도의 건물로 들어서니 간소한 호텔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화장실과 욕실, 차를 끓여 마실 수 있는 시설까지 마련된 곳이었다.


저녁 시간이 되자 당직 직원이 오더니 메뉴판을 보며 주며 뭘 먹겠냐고 했다.


병원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영국에 산모식은커녕 환자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구나' 싶을 정도로 부실한 음식 투성이었다. 기껏 해야 샌드위치와 탄산음료 정도. 아침에는 찬 우유와 시리얼, 토스트를 주기도 했다. 그런데, 본격적인 분만을 앞둔 저녁 무렵에는 정식 요리를 대령해 주나 싶었다.


메뉴판에 보이는 몇 안 되는 요리 중 ‘개먼 스테이크’라는 이름이 눈에 띄어 이걸 주문했다. 개먼 (Gammon)이 뭔지 모르겠으나 스테이크는 먹을 만하다 싶어서.


그런데...


세상에, 음식이 짜도 짜도 어쩜 그렇게 짤 수가 있나? 아예 소금 범벅이다 싶을 정도로 짠맛이 강한 고기 덩어리가 접시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개먼은 소금에 절인 영국식 돼지고기로 베이컨이나 햄과 유사하다.


나는 그다지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다. 맛과 상관없이 주어진 음식은 뭐든 감사하게 맛있게 잘 먹기에 내가 식사하는 모습을 다들 칭찬해 주곤 한다.


병원에서 매번 내 식사를 날라다 주던 직원도 마찬가지다.


나를 손녀뻘로 귀엽게 봐서인지, 아니면 타지에서 외롭게 출산하는 외국인을 동정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병실에 들를 때마다 온화한 미소와 살가운 인사로 대하던 분이었다.


그다지 맛은 없지만 출산을 앞두고 있어 든든하게 먹어야겠다 싶어 꾸역꾸역 먹는 내 의도를 상대가 알 리 없다. 오히려, 먹성 좋은 임산부에게 밥이 모자라면 어쩌나 싶어 남은 과일이나 디저트를 가져다주곤 했다.


그런데, 이날 도착한 개먼 스테이크를 앞에 두고 도저히 평소처럼 맛있게 먹는 연기를 해낼 자신이 없었다. 맛있게 먹는 흉내도 어느 정도 먹을 만해야 가능하지... 완전 소태를 어떻게 삼키느냐 말이다. 보통 사람도 먹거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판에 임산부에게 이런 소금 덩어리 가공육을 제공하다니!


접시에 곁들여져 나온 파인애플과 야채만이라도 먹을까 했더니, 고기에서 흘러넘친 소금물이 베어서인지 이마저도 짜서 못 먹을 지경이었다.


다행히, 낮에 지인이 가져다준 미역국과 밥이 남아서 이걸로 끼니는 때울 수 있었지만, 문제는 거의 손도 안 댄 음식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였다. 나중에 식기를 되가져갈 직원과 마주할 일이 고민이었다. 친할머니처럼 다정하게 대하며 음식을 날라다 주는 직원의 정성을 생각해 맛없는 밥이라도 맛있게 먹어 왔는데, 이번에는 거의 손도 못 대고 남기지 않았나.


궁리 끝에, 고기를 통째로 신문지에 싸서 눈에 띄지 않게 휴지통에 갖다 버리기로 했다. 맛있게 잘 먹는다는 칭찬도 너무 자주 받으면 때론 불편하구나 싶었다.


나름 완벽한 증거인멸에도 불구하고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배고프지? 아내가 스테이크 맛있게 먹고 싹 다 비웠던데, 자네도 한 접시 갖다 줄까?”


남편이 기저귀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이 할머니 직원과 마주쳤다고 한다.


저녁으로 나온 스테이크가 기겁할 정도의 짠맛이라는 이야기를 이미 내게서 들었던 남편은 정중히 거절한다고 쩔쩔매야 했다. 보호자를 위한 식사가 없는 곳인데, 월권행위를 하면서까지 정을 베풂을 알기에 더욱 곤란했으리라.


그나저나 그날 먹은 개먼 스테이크는 왜 그리 짰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최초로 맛본 낯선 음식이라서?

아니면...

유도분만제와 진통제에 취하고 잠까지 설치느라 내 미각에 혼란이 생긴 걸까?


커다란 생선 젓갈을 국물과 함께 통째로 삼킨 느낌이랄까.


나중에 식당에서 정식으로 시켜 본 개먼 스테이크는, 여전히 짜고 또 여전히 돈 주고 사 먹을 요리는 아니다 싶지만, 그래도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그때 먹은 고기는 왜 그토록 짰단 말인가.


양수가 터지는구나 싶었던 순간부터 아이를 품에 안기까지 불안하고 황당했던 기억으로 가득한데, 그중 아직도 떠나지 않는 장면이요, 혀끝 기억이자, 의문으로 남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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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이미지: Photo by Alicia Petresc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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