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이 끝나고, 진짜 삶이 시작됐다
제주에 온 지 114일째.
처음엔 모든 게 반짝였다.
돌담도, 노을도, 카페의 커피 향도.
그 낯선 풍경 안에서 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느꼈다. 하지만 100일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제주살이는 여행이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문제집처럼 주어지고
그 문제를 풀어내야 하는 현실의 연속이었다.
이제야 제주가 나에게 묻는다.
제주로 내려온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이었다.
공부보다 삶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도시에서의 평일 일상은 늘 같았다.
학교, 학원, 집.
시간에 쫓기듯 살아가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지식보다 오래 남는 건 기억이고 감정이며
사랑받는 시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결심했다.
아이들에게 속도 대신 여유를,
경쟁 대신 경험을 주기로.
이곳에서의 아이들은 달랐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바다로 뛰어가
수영복 없이 바다에 풍덩하고 모래놀이를 한다.
파도에 발을 담그며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비록 부모로서 완벽하진 않지만
이곳에서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오전에 집에서 5분 거리인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엔 장을 보거나 글을 쓴다.
관광지의 화려함보단 마트 계산대 앞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는 시간이 훨씬 많다.
일이 끝나면 다시 엄마의 하루가 시작된다.
저녁을 차리고 하교한 아이들과 지지고 볶고
하루의 잔소리를 반성하다 보면
밤은 어느새 깊어진다.
도시의 빠름은 나를 지치게 했지만
제주의 느림은 나를 숨 쉬게 했다.
제주살이는 돈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믿었지만
살다 보니 돈이 마음을 흔드는 날도 많았다.
생활비, 차 유지비, 식비, 예상치 못한 수리비.
지출은 꾸준한데 수입은 일정하지 않다.
남편이 보내주는 생활비와 내가 버는
아르바이트비로 일상을 꾸려가고 있다.
제주살이는 예상보다 돈이 많이 든다.
처음엔 그게 불안했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출이 많다는 건 그만큼 내가 더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활비를 아껴 걱정만 하기보다
그 안에서 새로운 걸 배우고 시도하는 일이 많아졌다.
마트를 다니며 지역 식재료를 익히고
아이들과 함께 체험할 곳을 찾아다니며 콘텐츠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돈이 줄어드는 속도보다
그 안에서 생기는 경험과 기록이 더 값지게 느껴진다.
이제는 ‘돈을 쓴다’보다 ‘살아본다’는 감각이 조금 더
커지고 있다.
사람들은 제주살이의 가장 큰 단점을 습기나
물가라고 말하지만 내게는 벌레였다.
한 달 전, 손바닥만 한 지네가 세탁실로 들어왔다.
그날 이후 집 안이 전쟁터가 됐다.
이틀 만에 천장과 바닥, 세탁기 뒤 심지어 아이 책 속에서까지 지네알이 터져 나왔다. 거짓말처럼 20마리가 넘는 지네가 이틀 동안 나타났다.
나는 그날 이후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살충제를 매일 뿌렸고 환기시키고 제습기를 연속 돌렸다.
도마뱀은 현관 앞을 수시로 드나들었고 왕거미도
몇 번 벽을 기어올랐다. 며칠 전엔 마당에서 제초하다가 죽은 작은 뱀 한 마리를 봤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주는 자연이 아름답지만 그 자연 속에서 산다는 것은 낭만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이곳에선 그조차 자연의 일부가 되어야 했다.
얼마 전 아들 친구 생일파티에서 만난 엄마들한테
지네와 뱀 출몰 이야기를 꺼냈더니 오신 지 얼마 되셨냐고 되물었다. 3개월 지났다고 하니 제주로 이주한 지 몇 년 된 엄마들은 여유 있게 대답했다.
"제주에서 벌레 보는 건 일상이에요."
벌레보다 더 피하기 어려운 건 날씨다.
제주의 하늘은 하루에도 몇 번씩 표정을 바꾼다.
아침엔 해가 쨍하다가 오후엔 바람이 몰아치고
저녁엔 폭우가 쏟아진다.
습한 공기 덕분에 빨래는 사흘이 지나도 마르지 않고
이불에서는 눅눅한 냄새가 배어 나온다.
하루 종일 제습기를 돌려도
벽에는 곰팡이가 피고 바닥은 축축하다.
비가 오면 운전도 쉽지 않다.
도로는 미끄럽고 안개로 시야는 뿌옇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비 오는 날의 제주 풍경을 보면 또 마음이 잔잔해진다.
이 섬은 불편함조차도 풍경으로 남는다.
이제는 현관 앞을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됐다.
문틀을 수시로 청소하고 방역업체 불러 집구석구석
방역도 하고 제습기는 24시간 작동시킨다.
벌레에 대한 불안은 여전하지만
이젠 도망치기보다 적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곳에 머물고 있다.
이 섬은 내게 버티는 법을 가르쳐줬다.
비 오는 날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
노을이 들이치는 저녁의 부엌.
그 사소한 순간들이
내 마음의 균형을 다시 맞춰준다.
이곳의 시간은 느리지만
그 느림 속에서 나는 삶을 온전히 체감한다.
제주살이는 쉽지 않다.
날씨, 벌레, 외로움, 돈, 불안…
그 모든 것들이 날마다 나를 시험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이제는 도망치듯 떠나온 내가 아니라
버티며 배우는 나로 살고 있다.
아직도 불안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섬에서 하루를 세우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결론은 단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