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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살이 120일째, 다시 살아나는 나를 만나다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by Remi

육지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일은 영업직이었다.
사실 원해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엄마의 지인과 식사하던 자리에서 우연히 이야기가 오갔고
그 길로 얼떨결에 뛰어든 직업이었다.

처음엔 괜찮았다.
성과도 좋았고 수입은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마음이 말라갔다. 실적은 오르는데 삶의 온도는 내려가고 계약서를 손에 쥘 때마다 나는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돈이 많아질수록 나 자신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중국어 전공자다. 결혼 전까지 10년 가까이 중국어를 가르치며 아이들의 눈빛 속에서 배움의 기쁨을 보았다. 난 그 일이 좋았다. 그런데 결혼과 육아가 시작되면서 모든 것이 멈췄다. 아이들이 자라 다시 여유가 생겼을 땐 이미 세상과 나 사이엔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생겨 있었다.

그 거리감을 메우기 위해 시작한 영업직은
결국 나를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성과 중심의 냉정한 세계,
끝없는 경쟁 그리고 인간관계의 피로.


자율출근이라는 말은 듣기엔 자유로웠지만
결국 나를 침대 위에 머물게 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작아졌다.
일을 한다가 아니라 그저 존재한다는 감각만 남았다.

그 무기력의 끝에서 나는 다시 숨 쉬고 싶었다.
비록 새로운 계획도 확실한 목표도 없었다.
그저 '살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다.






제주에 와서 한 달쯤 되었을 때 집 앞 5분 거리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단지 집과 가깝고 아이들이 학교 간 시간 중 4시간의 알바시간이 나의

조건에 딱 맞아 너무 매력적이었다. 아이들 학교 간

시간만큼은 사람들을 만나고 생산적으로 살고

싶었다.

내가 일하는 곳은 하루 매출이 몇백만 원이 넘는,
관광객보다 도민 단골이 더 자주 찾는 찐 로컬 맛집이다. 점심시간 웨이팅은 기본이고
한순간도 멈춤이 없는 식당의 리듬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일을 막 시작했을 땐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다.
손님을 맞이하고 음식 그릇을 나르고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하는 동안 4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주인 분들은 그걸 알아봐 주셨고 그때부터 나를 믿어 주셨다. 그 믿음이 이 일의 가장 큰 보상이었다.

이제는 나름의 베테랑이라는 자부심도 생겼다.
손님이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몇 명이 들어왔는지 감이 잡히고
음식이 나갈 타이밍, 물 잔이 비는 순간,
그 작은 리듬이 몸에 새겨졌다.
손이 바쁘고 머리가 복잡한 그 4시간이
지금의 내 하루를 가장 빛나게 만든다.




이 일을 하며 가장 감사한 건 사람들이다.
처음엔 낯선 얼굴들이었지만 이제는 익숙한 표정과 목소리로 하루를 채운다. 어떤 손님은 내가 인사를 건네자 “주인 바뀐 줄 알았어요”라며 웃었고
센스 있게 챙겨드린 서비스 덕에 팁을 남기고 간 분들도 있었다. 그런 순간마다 내 안의 무기력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난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회복하는 과정이 되었다.
손님이 “잘 먹었어요” 하고 미소 지을 때면
그 말 한마디가 하루의 피로를 다 지워준다.
육지에서 영업이라는 일을 할 때는 매일 사람들에게 상처받았는데 지금은 사람 덕분에 마음이 회복된다.



일을 시작한 건 용돈벌이였지만
지금은 내 하루의 중심이 되었다.
손님을 맞고 주문을 받고 식기를 정리하는 반복 속에서
나는 내 삶의 리듬을 다시 찾았다.
피곤하고 발이 아프고 팔이 뻐근하지만
그 피로가 오히려 좋다.
몸이 움직이니 마음도 함께 움직인다.

제주에서의 이 일은
단순한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내 안의 멈춰 있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한 삶의 훈련이다.


제주살이는 여전히 쉽지 않다.
하지만 이제 나는 불안보다 리듬을,
무기력보다 움직임을 믿는다.

하루 네 시간의 일.
그 짧은 시간 안에서
나는 다시 세상과 연결되고
누군가의 기억 속 따뜻한 한 장면으로 남는다.

이제 알겠다.
살아간다는 건 거창한 게 아니라
오늘 내 몫의 일을 다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내일도 에이프런을 두를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나를
가장 단단하게 만드는 방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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