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나를 위로할 차례
대부분 사람들이 하는 말 중
'나 요즘 건망증인가 봐.',
'자꾸 깜박깜박해.'
이건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기억력이 점점 무뎌지고 있다.
어제 뭐 했는지, 심지어 오전에 뭐 했는지
기억하려면 한참이 걸린다.
아이들과 얘기하다 보면 전혀 기억나진
않지만 아이들이 엄마가 그랬지라고 했을 땐
거짓으로 리액션할 때가 많다.
(사실 엄마 전혀 생각이 안 나)
기억은 기록하지 않으면 금세 휘발되어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그래서 매일
블로그에 포스팅을 해왔던 지난 10년.
(정확히 말하면 2년 동안은 하루도 빠짐
없이 1일 1 포스팅을 이어오고 있다.)
기록 덕분에 의미 없어 보이는 순간도
기록하면 무언가로 남게 된다.
나는 2년 전 처음으로 번아웃이라는
증후군을 겪었다. 10년 동안 육아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은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게...'
대단하다는 말을 90% 이상 들었던 것 같다.
내 아이 키우고 살림 빈틈없이 살고
가족을 위해 집밥 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 칭찬들을 극렬히 저항하고 싶었다.
나는 10년 동안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고 비범한 삶을 좇았다. 엄마로, 아내로
살면서 나의 10년을 통째로 갈아 넣었다.
예전에는 힘든 신호가 와도 꾸역꾸역 잘 버텼다.
육퇴 후 술에 의존하기도 했고 주말을 기다리면서
가족들과 여행, 캠핑으로 치유할 수 있었다.
힘든 시기가 와도 멈추지 않았고 무조건 앞으로 나갔다.
그래서인지 2년 전부터 반갑지 않은 손님,
살면서 처음 만난 손님 바로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낯선 손님을 만나게 되었다.
수시로 우울했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지하 10층까지 내려갔다. 고슴도치처럼
모든 일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신경이 곤두섰다.
평소에 늘 해왔던 집안일은 파업시키고
더 이상 손대고 싶지도 않았고 심지어
나쁜 생각까지 드는 날들의 연속.
누군가가 진심으로 잡아주길 바랬지만
모든 상황이 혼자 버텨야만 했던 나의 한계를 넘어섰다. 어쩜 내가 그동안 노력해 봤자
돌아오는 시큰둥한 반응에 살아야 할 의미를
잃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
사람은 인정 욕구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인정 욕구와 같은 보상 욕구를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서 예기치 못하게 튀어나온다고 했다. 아마 그런 공허함들이
나에게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힘든 시간을
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번아웃을 이기기 위해 운동을 했지만
쉽게 방전이 되고 회복하기 어렵고 오히려 더 무기력해져 소파와 한 몸으로 자꾸 눕고 싶었다.
나는 자주 눕고 싶었고 체력이 바닥을 쳤다.
매일 하는 운동도 즐겁지 않았고 무기력하게 있는 날들의 연속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쉬어도 개운하지 않았고 온갖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극도로 예민해지고 사소한 일에 화를 쉽게 냈다.
소음이 싫어 음악도 TV도 시청하지 않았고 꼭
필요이상의 외출 외엔 집에서 은둔했다.
몸과 마음이 심각하게 피폐해져 처음으로 우울증
약도 먹어봤다.
정신과 약을 정확히 한 달을 먹었다.
약 효과 때문인지 기분이 가라앉아서 조금 덜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더 이상 약에
의존하고 싶지 않아서 약을 끊었다.
예전과 많이 달라진 점이라면 게으름을 부렸다.
집안일은 주 1,2회로 더 이상 무리하게
정리정돈을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고 나를 챙기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숨 쉬고 있는 나를 느끼고 직면하기 시작했다.
고통은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사람에게 쉼이 얼마나 소중 한 지 깊게 깨달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허깨비 같았던 내 모습과
아픈 고통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어쩌면 이 고통스러운 시간은 마흔이 된
중간항로를 점검하는 시간이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의 목적을 찾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매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여행이 내게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은 치유였다. 누군가는 그저
휴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내겐 생존이었다.
지쳐서 무너진 마음을 붙들고
고요한 바다 앞에 앉아 나를 토닥였다.
그렇게 며칠을 걷고, 쉬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아주 천천히
나에게로 돌아왔다.
삶은 여전히 바쁘고 고단하다.
아이들을 챙기고 끼니를 고민하고
내 몫의 일들을 해내야 하는 날들의 연속.
달라진 건 없다. 하지만 그 삶을 바라보는
내가 달라졌다.
예전엔 스스로를 다그치고 늘 여유가 없었고
매일 부족한 사람처럼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나는 그동안 충분히 잘해왔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내가
나에게 가혹하지 않기로.
조금은 느슨하게
그리고 더 다정하게 살아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