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버거집 사장

영재

by 콰드로페니아

내가 “채식을 시작해볼까?” 하고 떠들며 돌아다니던 걸 기억하니?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이기적인지 설명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그 이후로 나는 제대로 된 채식을 몇 번 해보지 못했어. 비겁하다고 욕해도 좋아. 그렇지만 정말이지, 채식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기하고 참아야 하는 것이더라. 이미 이 세상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으로 돌아가고 있고, 나 또한 그런 세상에서 평생을 살아왔으니 쉽지 않을 수밖에 없지. 내가 채식에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어. 친구야, 그런데도 왜 나는 저 단어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걸까? 고소한 기름이 흐르는 삼겹살을 그토록 좋아하는 내가, 푹 고아낸 사골로 끓여낸 라멘을 먹기 위해 맛집을 찾는 내가, 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해버린 내가… 대체 뭐가 아쉽다고 괜히 한 번쯤 멈추어 고민하게 되는 걸까?


내가 나중에 햄버거 가게를 차리고 싶다고 얘기했던 적이 있었나? 물론 반쯤은 농담이지. 그렇지만 내가 장사를 하게 된다면 아마 햄버거 가게를 차렸을 거야. 내가 단순히 햄버거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해. 내가 좋아하는 햄버거를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먹다 보니 내 취향의 햄버거가 생기더라. 내가 먹은 햄버거의 부족한 점이나 만족스러운 점을 꽤나 섬세하게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햄버거를 나름 잘 알게 되었다는 생각까지 들었지. 그래서인지 이왕 장사를 한다면 햄버거 가게를 차리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생긴 것 같아.


여행을 가면 꼭 맛있는 버거집을 찾아가 보는 취미도 생겼어. 햄버거가 얼마나 매력적인 음식인지 아니? 가게 주인의 취향에 따라 그 맛이 천차만별이야. 어떤 곳은 말랑하고 부드러운 빵을 사용하고, 어떤 곳은 버터를 두른 팬에 바짝 구워 바삭한 식감을 내는 빵을 사용하기도 해. 생양파를 사용하는 곳도 있지만, 달큰하게 볶아 패티 위에 얹는 곳도 있지. 가끔 버거에 내가 싫어하는 피클을 사용하지 않아서, 굳이 피클을 빼 달라는 요청을 할 필요가 없는 곳을 만날 때도 있어. 이렇게 버거에 들어갈 수 있는 재료가 무궁무진한 데다 각각의 재료들이 어떻게 조리되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버거가 되니까 비교해보는 재미도 정말 쏠쏠해.


그렇지만 맛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하나의 재료를 고르라면, 단연 패티라고 할 수 있지. 다른 재료를 모두 똑같이 썼다고 하더라도 패티를 만드는 데 사용된 고기가 어느 부위인지, 지방량이 얼마나 되는지, 소가 아닌 돼지고기를 섞는지, 반죽을 얼마나 치대는지에 따라서 햄버거의 맛이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거든. 아마 내가 버거집 사장이 되었다면 버거에 들어가는 패티를 연구하는 데 가장 큰 노력을 들였을 거야. 내가 버거집을 찾아다닐 때마다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당연히 버거의 패티지. 설마 내가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고 버거집을 차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겠니. 패티의 향이 어떤지, 질감과 식감은 또 어떤지 따져보면 끝도 없어. 정말 맛있는 햄버거는 ‘내가 차린 가게에는 이런 패티가 들어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패티야. 아마 먹어볼 수는 없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게의 버거를 너에게 준다면, 너도 정말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드네.


그나저나 참 웃기지 않니? 동물권에 관심을 가지고 비건 생활까지 고려했던 내가, 뒤에선 햄버거의 매력에 심취해 버거 가게를 차리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니 말이야. 가끔은 나의 채식 생활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어. 모두에게 주어진 당연한 선택지 중 하나를 구태여 배제하는 일이잖아. 남이 누리는 선택지를 포기하는 것은 나에게만 국한된 불편이 아니라고 느껴져. 그들에게 매번 나의 처지를 설명해야 하고,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불편한 질문을 던지거나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겠지. 안그래도 금방 고르지 못하는 식사메뉴를 나 때문에 더 고민하게 될 거야. 미안함에 안절부절못하는 나의 모습이 눈에 선하네. 말 못 하는 가축을 불쌍하게 여겨 선택한 나의 행동이, 함께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꼴이지. 이런 상상은 아직 실행으로 옮겨보지조차 않은 나의 행동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해. 어딘가에서 고통받는 소와 돼지를 위하는 것과, 당장 내 눈앞의 친구들이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게 하는 것. 그 둘 중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일까. 그 불편함과 손을 잡고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다 보면 나에게 정말로 동물을 아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기는 한지마저 의심스러워지지 않겠니?




너랑 헤어지고 난 후에 난 유럽의 여러 도시로 여행을 다녀왔어. 그중 하나인 폴란드의 크라쿠프는 바르샤바 이전에 폴란드의 수도의 역할을 하던 대도시야. 이름도 낯선 이 도시를 여행하기로 한 이유는 단순했어. 크라쿠프 인근에 위치한 나치 독일의 유대인 절멸 수용소, 아우슈비츠를 들를 수 있기 때문이었지. 아우슈비츠에서 마주한 나치의 만행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어. 같이 수용소 투어를 참여한 몇몇은 나이가 지긋하신 가이드분의 설명을 들으며 연신 눈물을 훔쳤지.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장소더라. 그런데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제1 수용소는 사실 생각만큼 크지 않았어. 물론 작은 규모는 아니었지만 여기서 백만 명이나 죽임을 당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거든. 하지만 이런 생각은 금방 사라져버렸지.


이어서 나는 투어 벤을 타고 근처에 있는 제2 수용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이동했어. 거기서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아니? 담담하게 줄 서 있는 날카로운 철조망과, 말도 안 되게 넓은 면적의 수용소 터였어.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땅의 끝까지 전부 다 수용소의 터였으니까 얼마나 넓었을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심지어 그 면적은 전체의 1/4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어. 거대한 돼지우리 같았지. 그 숨 막히는 곳에서 몇십만 명의 유대인이 맨살을 부대끼며 버텨왔던 거야. 우리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본 적이 있니? 그게 만약 가족이나 나였다면? 아우슈비츠 곳곳을 보며 그 안에 갇힌 무력한 내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어. 오물에 뒤범벅이 된 채 잠을 기다리는 나. 한여름에 넘쳐흐르는 땀과 열기로 함께 있는 사람을 원망하고 증오하는 나. 번호를 불려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끌려가는 나. 죽음을 예견하고도 거친 반항 한 번 할 수 없는 나. 상상만으로도 어찌나 답답하고 억울한지 눈물이 핑 도는 것만 같더라. 친구야, 그리고 나는 너를 생각했어.


직접 찍은 비르케나우-아우슈비츠의 사진. 끝이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넓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이전에 보았던 글이 갑자기 떠올랐어. 누군가 작가 유발 하라리에게 미래의 인류가 지금을 되돌아보았을 때 가장 끔찍하게 여길 일이 무엇일 것 같냐고 물어보는 내용이었지. 무엇을 21세기 홀로코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지 말이야. 그는 공장식 축산이라고 대답했어. 그 글이 떠오르자 수용소에 갇혀있던 나를 상상하던 스스로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더라. 내가 아까 그 끔찍한 곳을 거대한 돼지우리 같다고 했었지.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돼지가 산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거야. 나와 돼지가 무엇이 그렇게 다른지 곰곰이 생각해봤어. 수용소에 갇힌 상상 속의 나를 돼지로 바꾸어 봐도, 실낱 같은 생명 하나 붙잡고 있는 나와 돼지는 도대체 다른 점이 하나 없더라.


그래서 지금은 햄버거를 먹지 않냐고? 아니 나는 아직도 종종 햄버거를 즐겨 먹어. 이런 내가 맛있는 음식을 위해 죽임을 당하는 가축을 감히 불쌍하다고 여기다니 얼마나 거만한 처사니. 나에게 그들을 불쌍히 여길 자격이나 있을지 의문이야. 내가 채식을 한다면 과연 뭐가 달라질까. 비겁한 자기 위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면 어쩌지.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는 그들을 위하는 것이 더 나을까? 가끔씩은 이런 생각들을 잊으려 노력해. 마음속의 불편함을 지워내려고 열심히 고민했는데,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셈이 되었네.


사랑하는 내 친구야. 고기를 먹는 것이 너의 살점을 뜯어먹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육식을 멈출 수 있을까? 이것 또한 생각뿐이니 그저 머뭇거리는 것에 그치려나. 내 옆에 기대어있는 너를 보면 지구 상의 모든 생명을 떠올리게 돼. 채식이란 단어에 눈이 가는 이유는 너로부터 비롯되었을지도 몰라. 말없이 희로애락을 잔뜩 표현하는 너. 넘치는 생명력을 뿜어내는 너를 보면 괜스레 눈 앞이 아찔해지곤 하지. 나와 같은 생명, 너와 다른 생명. 그것을 나는 무슨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을까?


몇 년 전 내 삶에 등장해서 별안간 내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은 나의 반려견 버디에게.


버디

너는 이런 나를 이해하니? 너와 같을지 모르는 소와 돼지를 생각하는 것 말이야. 너가 사람처럼 말을 할 줄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겉으론 채식을 해볼까 떠들고 다니면서 속으로는 버거 가게 사장을 꿈꾸었던 나에게 말이야. 보이지 않는 것은 잊고 맛있는 삶을 살라고 해주려나. 아니면 깊은 우물 같은 두 눈으로 날 바라보며 햄버거를 먹는 건 그만두라고 말해주려나. 버디야, 너가 나이가 들어 내 곁에서 사라지면 이런 고민들도 더불어 사라지게 될까? 조금씩 나를 괴롭히며 나쁜 음식이 되어버린 햄버거도 무심하게 삼킬 수 있게 될까? 이런 생각들이 지구 상의 소와 돼지뿐만이 아니라 너를 위한 것이기도 할까? 한편으로는 이런 치열한 고민들이 너와 함께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 버디야 너는 나의 고민을 어떻게 생각하니. 이런 나에게 너는 무슨 말을 해주고 싶니.




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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