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십억 년간 우리의 직계 조상은 모두 번식에 성공했고 우리는 그들로부터 생에 대한 제법 강한 갈망을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동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죽기 한참 전에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수 있는 동물종은 인간뿐인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동물 종이 미래를 향해 행동하기는 해도, 자신을 특정 미래에 데려다 놓을 수 있는 동물 종은 인간뿐입니다. (‘미래의 나’라는 캐릭터를 만들어서)
“우연이 제안하고 자연이 선택한다.” 이것이 진화의 슬로건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한 네 발 생물에 목을 조금 길게 하는 돌연변이가 발생하였고, 그 기다란 목은 높이 있는 나뭇잎을 먹는 데에 특장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목이 무한정 길어지면 단점도 생기기 때문에 그 목의 길이에는 한계와 범위가 생기게 됩니다. 진화는 경제학과 친구입니다. 진화적으로 날개가 달린 말은 말이 안 되는 이유도 같습니다. 튼튼하고 밀도 높은 뼈를 가지고 있는 말이 무거운 몸을 지탱하면서 비행에 필요한 날개를 추가하는 건, 엄청난 부담입니다. 마치 씨름 선수가 매끼 오마카세로만으로 배를 채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특정 환경에 유리한 특성을 가진 생명은 번성했습니다. 각 생물은 적소(특정한 생태학적 영역)에 맞추어 자신의 생물학적 능력과 적응력을 키워 갔습니다.
진화의 관점에서 죽음은 필요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아이폰 공장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아이폰 공장(DNA)의 목적은 아이폰을 더 많이 판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쟁 상대는 삼성의 갤럭시 시리즈입니다. 아이폰을 사용하다 보면 고장이 날 수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출고 직후 고장률을 낮춰야 합니다. 출고 직후에 고장이 잦으면 아무도 아이폰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반대로, 출고 2년 후 고장률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구세대의 아이폰은 다음 세대의 아이폰이 나올 때까지만 무사히 견뎌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신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 나이가 넘어서면 암과 뇌 질환의 발병률이 수직 상승합니다. 우리 몸은 먼지(죽은 세포와 뇌 속의 단백질 찌꺼기)를 쓸어내고 오류를 방지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이 듦에 따라 몸에 오류가 누적되고 먼지를 쓸어내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증가합니다. 이 밖에도 소모품인 신체 기관은 너덜너덜해지고 자체적 유지 보수에 점차 큰 비용이 들어갑니다.
구세대의 아이폰은 신세대의 갤럭시에게 밀리기 마련입니다. 자연(소비자)은 더 적응력 있는 기능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세대의 아이폰은 강화된 기능이 있거나, 새로운 기능이 탑재될 확률이 있습니다. 시대가 변하기 때문에 아이폰 15를 시도하지 않으면 애플은 갤럭시에게 밀려날 수 있습니다. 유전자는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기에, 끊임없이 변이를 통해 새로운 버전을 시도합니다(기본적으로는 자신이 살아가던 과거 환경에 적합했던 유산을 다음 세대에 물려줍니다).
책 <데미안>의 서문이 일러주듯, 우리는 모두가 똑같은 협곡, 저 깊은 심연에서 내던져진 주사위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그러하듯, 죽음 또한 철저히 경제적인 진화의 섭리임을 받아들인다면, 너무 깊은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소중한 것이 사라졌다고 슬퍼할 거 없다. 세상에서는 실제로 아무것도 죽지 않으니까.” (···) 나는 태어난 곳이 아닌 곳에서 태어났다. 죽은 건 내가 아니라 이 삶이라는 껍데기였다. - 동구, <비밀 수집가>)
+ 자연선택은 개체의 수명 감소를 유발하는 유전 변이라 할지라도, 그 변이가 생식 능력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제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즉, 짧은 수명을 가진 개체가 일반 개체와 동일한 수의 자손을 낳는다면, 해당 변이의 빈도(수명을 줄이는 유전자를 가진 개체의 수나 비율)는 세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한편, ‘노화진화 이론’은 우리 몸이 젊을 때 최대의 생식 능력을 발휘하도록 유전적으로 설계되었으며, 이후 노화가 진행되는 것은 그 대가라고 설명합니다(이득을 위한 희생, 길항적 다면발현). 오히려 생식하지 않는 늙은 개체가 오래 살아남아 다음 세대가 이용할 자원을 사용하면 종 전체의 적응도는 떨어집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생식이 끝난 늙은 개체를 위한 자연선택은 없다(이대한 유전학자).”**
* 노화를 먼지가 쌓이는 것에 비유했지만 실제 노화 메커니즘은 훨씬 복잡합니다. 텔로미어 단축, 세포 노화, 후성유전학적 변화, 단백질 항상성 상실, 미토콘드리아 기능 장애 등등 다양한 요인이 얽혀 있다고 합니다.
** 이대한, <인간은 왜 인간이고 초파리는 왜 초파리인가>을 참고했습니다.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원장의 책 제목 <찬란한 멸종>이 참 인상 깊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등장하려면 빈자리, 빈 틈새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생태계는 언제나 꽉 차 있어서 누군가 생태계에 새로운 빈자리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찬란한 멸종’이 때때로 찾아와 새로운 생명을 위한 무대를 마련해줍니다. 우리 이전에 수많은 종이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수많은 찬란한 죽음 덕에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도 너무 욕심내지 말고, 때가 되면 다른 사람과 생물 종에 자리를 내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은 어느새 평범해진다
매우 드물고 잘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단 한 번의 변이’가 진화를 이끌어가는 강력한 원동력이 됩니다. 어쩌다 한 번 특별한 개체가 태어나면, 몇 세대 지나지 않아 그 특별함이 종의 ‘표준’이 됩니다. 우리 사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스마트폰은 더 이상 놀라운 기술이 아닙니다. 기업이 요구하는 지원자의 정량적 스펙도 올라가면 올라갔지, 내려가지는 않습니다. 진화의 세계에선 한때 특별했던 모든 것이 평범해집니다. 원래는 선택지 중 하나였던 것들이 의무 사항이 되어버립니다. (몇 몇 모범 사례가 모든 사람의 구속복이 되어버립니다.)
한편, 인간 사회의 표준에 맞추기 위해 너무 많은 사람이 자신의 특수성을 포기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특별해지기보다 평범해지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우리 사회의 수많은 얼굴들. (물론, 파울로 코엘료가 책 <순례자>에서 짚었듯, 비범한 삶은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의 길 위에 있습니다.)
다니엘 S. 밀로의 책 <미래중독자>에 따르면, 인간은 ‘내일’이라는 개념을 발명함으로써 미래를 계획하고, 축적하며, 현재의 만족을 유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인류가 생존하고 번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내일’에 대한 집착은 곧 ‘미래 중독’으로 이어집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끊임없이 계획하고 준비하며, 과잉을 추구하게 됩니다. 요즘은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종착지가 한참이나 더 멀어진 듯 보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을 병원 같은 공간에 격리하며,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죽음에 대한 논의 역시 암암리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 급작스레 길어진 노후를 막연히 걱정하며 수많은 내일을 계획하지만 정작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을 생각하지만 죽음은 생각하지 않을 때’ 참혹한 비극이 발생합니다. 죽음은 삶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강화하는 중요한 요소인데, 이를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으면, 그러니까 끝을 상정하지 않으면 삶 자체가 알 수 없는 노후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그저 과잉과 축적의 연속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병철 철학자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벌거벗은 삶에 대한 근심 속에서 타자에게 굴종하고 결국 노예가 되기를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완결지을 줄 알아야 합니다. “완결을 알지 못하는 성과 주체는 실적 강박 속에서 바스라”집니다.
내일을 위해 모든 것을 축적하고 계획하지만, 정작 가장 확실한 내일인 죽음에 대해서는 너무 막연해서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습니다. 동시에 100세, 120세. 노후 생활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릅니다. 그렇게 청춘은 푸르른 계절이 아니라 늦기 전에 기나긴 겨울나기를 준비해야 하는 스산한 계절이 되어버렸습니다.
내일에 대한 불안과 기대로 현재의 행복을 유보하고 희생하지만, 그 내일이 영원히 오지 않거나, 혹은 죽음으로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오늘마저 불행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비극은 ‘미래 중독자’인 우리들이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이며, 삶의 유한성을 직시하고 죽음에 관해 함께 이야기해야 할 필요성을 시사합니다. 존엄사에 대한 더 집단적이고 결단적인 논의를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겨울나기와 축적에 관련된 에세이를 부록에 첨부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겨우살이를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 - 톨스토이-
자연 수명을 훨씬 웃도는 시간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니 육체는 덜거덕거리고 점차 가족도 몰라보게 되며, ‘나’라는 자아의 연속성도 사라집니다. 물론 기억이 온전히 작동하지 않아도 지각 분별력이 남아 있고, 살아가는 데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가 되어서는 살면서 행복했는지, 삶에 대해 되돌아볼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던 (혹은 가끔씩은 무거워서 내던지고 싶던) ‘내’가 영원히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는 웰다잉의 시대를 살아가야 합니다. 무작정 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나, 일단 더 오래오래 (가능하면 건강하게, 저속 노화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마음에서 잠시 벗어나야 합니다. 누구나 더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 의미는 제각각이겠습니다만, 저는 잘 살기 위해서 잘 죽는 법을 숙고하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몰아내기 위해 자기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합니다. 저에게는 이 책이 곧 새로운 ‘자기 인식’의 시도입니다. 내가 어디서 왔으며 (진화, 문화, 그리고 개인적인 삶을 통해 마음이 형성된 과정), 나라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선택에 가중치를 두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웰다잉’과 새로운 ‘자기 인식’이 21세기의 핵심 키워드로 부상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AI는 어디까지나 도구입니다. ‘나’를 확장하는 데 쓸 수는 있겠지만, 결코 본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사실 죽음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릅니다.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아는 현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모든 질문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질문은 이제야 비로소 여무는 중입니다. 저 또한 아직 죽음에 임박해 본 적이 없으며, 죽음에서 건너온 적이 없기에 함부로 죽음에 대해 말하기 조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하지만 존재가 아닌 기억으로 함께하는 사람이 있기에, 슬금슬금 죽음을 인식하고는 합니다.
기도는 헐벗음에서 온다. 유머가 불가능할 만큼 벗겨졌을 때 우리는 기도한다. 다른 것이 다 사라진 자리에서 기도한다. 삶은 헐벗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헐벗지 않을 수 없는 어떤 불가피성 속에서 살아간다.
- <은둔기계>, 김홍중
우리는 언젠가 헐벗게 될 것입니다.
헐벗게 될 모두를 위해, 저는 종종 기도 올립니다.
생성과 소멸 단일성의 원리
우리 모두는 약한 존재고
그 종착은 죽음이라
인류에 애틋함 느낄 수밖에
괴로운 순간도 즐거운 순간도
모든 순간은 순식간에 흩어지고
도저히 붙잡을 수 없지만 그렇기에
더 아름답고 소중한 순간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순간순간을 열렬히 호흡하고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행하는 것이
전부일지도 모르지만
이거 하나만 기억해. 우린 이 모든 걸 예상했었어.
다만... 이제 그걸 감당할 차례가 된 것뿐이야.
- 양영순, <달마건> -
사라지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 슬픔을 안고도 살아가는 게 인생이야.
-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
우주 속 우리들의 새드 엔딩 코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