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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력한 예린이 Oct 27. 2024

연막이 된 국제중, 방패가 된 외고

    나의 대문자 E, 극도로 외적인 성향이 인생에서 크게 꺾였던 시기가 있다. 대학원 석사과정 입학 후 한 달 동안이 그랬다. 내가 속한 학과는 상주할 수 있는 연구실을 랜덤으로 배정해 준다. 연구실은 총 3개로 이뤄져 있다. 연구실 1호는 주로 졸업을 앞둔 박사수료생들이 쓰는 방이다. 다른 두 개의 연구실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졸업 전 최종 단계까지 살아남은 멋진 전사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명예로운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입생은 자동으로 연구실 2호와 3호 중 하나를 쓰게 된다. 


    연구실에 들어서면 우리가 흔히 봐왔던 독서실 책상이 20개 가량 배치되어 있다. 독서실 책상만의 트레이드 마크인 칸막이가 없어서 언제든 양, 옆자리 친구들과 대화가 가능한 구조다. 덕분에 좌석이 가까운 선후배와 쉽게 친해질 기회가 많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개방된 구조 때문에 입학 후 초반에는 주변 사람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여러 번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떠드는 것만큼은 최고로 자신 있는 성격에 절대 귀찮지는 않았다. 단지 숨기고 싶은 정보가 많았기에 몇 날 며칠이고 수줍은 척 입 꾹 닫고 자리를 지켰다.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이 종종 들었다. 석사 과정 초반이라 바쁠 일도 없는데 매일같이 혼자 책상에 붙어 있던 나에 대해 궁금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한심한 생각에 갇혀 있느라 다른 사람의 시선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대학 졸업 후 내가 선택한 소속이 공부와 연구를 위한 대학원이니 이곳 사람들의 학부는 대체로 좋을 것이고, 상대방의 학부가 훌륭할수록 나를 무시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몰두했다. 쓸데없는 생각더미 갇히려던 때, 나와 또래로 보이는 한 선배가 말을 걸어줬다. 



“왜 이렇게 열심히 해요. 석사 초반에는 이렇게 안 해도 되는데 나중에 지쳐요”
 “아! 저 그냥 이것저것 다 어려워보여서요.”
 “쉬어가며 해요!”



    그 선배의 책상은 건너편이었다. 며칠 후, 우연한 기회로 그 선배는 서울대 학사, 석사를 졸업했고 현재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 거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날 이후로 선배의 책상은 유독 커 보였다. 이제 막 수업을 듣는 내 책장에는 책 두 권과 파일 두 개가 전부였는데, 선배의 책장에는 지금까지 공부해 온 자료와 졸업한 박사님들에게 받은 금장 제목의 하드커버 논문들이 가득히 꽂혀 있었다. 나의 책상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는데, 선배의 책상 위에는 동료연구생들의 손편지와 그들이 건넨 간식들이 놓여있었다. 같은 연구실을 쓰고 있지만 각자 한쪽 벽을 바라보고 앉은 선배와 나는 출발부터 다른 길을 걷는 것 같았다. 


    하루는 동기 한 명과 다른 선배와의 술자리가 있었다. 어색한 기류를 뚫기 위해서 또 한 번의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원채 술을 못하고, 어렸을 때부터 술은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배워서 몸도 마음도 술을 싫어하는데 그날만큼은 한잔했다. 긴장이 됐다. 친구가 내뱉는 00외고, 서울대, 수능 등의 단어가 마음 속에 콕콕 박혀 더 긴장이 됐다. 내 차례가 되자 나의‘과거 팔이’가 시작했다. 보통 자기소개는 가장 최근에 이룬 자신의 업적부터 내밀어야 하는 게 마땅한데, 나는 그랬다. 훌륭한 친구 옆에서 주눅들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앞에 앉은 선배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것인지, 일단 그렇게 했다. 



“저도 외고출신이긴 한데, 수능을 계속 망해서 대학을 늦게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대학은 조기졸업하고 바로 대학원에 온 거에요.”
 
 “뭐야, 예린씨도 외고에요? 영어 잘 하겠네요?”
 “아,,ㅎㅎ 엄청 잘 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국제중 준비했을 정도는 하는 것 같아요.”
 “아,, 그러면 논문은 쉽게 읽겠다!”



    말을 마치자 마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일단, 나는 국제중에 입학을 한 적이 없었다. 선배에게 ‘국제중 준비했을 정도’라고 말씀드렸으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방어적인 나의 태도가 드러난 것이 문제였다. 더는 자세히 묻지 말아줬으면 하는 듯하게 급히 뱉어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똑똑한 선배가 나의 의도를 알아채 준 것은 내심 좋았다. <국제중학교>라는 단어는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때부터 수준급의 영어를 구사했음을 내포했고, <준비>라는 단어는 어린시절에 치열하게 공부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00국제중학교 2회 입학생 시험에서 1차는 합격했고, 2차 심층면접까지 참여해 본 경험은 있었기 때문에 과거 얘기를 이어가면서 자존감을 극복할 기회만 찾았다. 그렇게 나의 연막이 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선배도 외국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수재였고, 친구와 선배의 외고는 내가 졸업한 외고보다 좋은 학교로 익히 알려진 곳이었다. 두 사람은 나보다 훨씬 영어를 잘 할 것임이 분명했고, 내가 부풀리고 싶었던 나의 이력이 귀여운 자랑 정도로 보였을 것 같아서 더 부끄러워졌다. 고학력자들 사이에서 특별한 공격권이 없던 내가 내밀 수 있는 유일한 방패였던 ‘외고’가 무너진 날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난생 처음 내 손으로 소주를 한 병 샀다. 더 취하고 싶다거나 기분이 나아지고 싶어서 산 것은 아니었다. 마구 울면서 분노를 쏟아내고 싶었는데 취기말고는 울 명분이 없었다. 집에 도착하니 너무 피곤했다. 구겨진 자존심을 감추려고 하루 종일 허리라도 곳곳이 세우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혼자서 술을 마셔본 적은 더 더욱 없어서 막상 마시려고 하니 뭔가 어렵게 느껴졌다. 먼저 안주라도 시켜보려고 배달어플을 뒤적였다. 하지만 금방 내 안주 취향이 뭔지 모르겠다는 이상한 핑계를 대며 유튜브를 어플로 넘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자야 했는데, 그래야 했는데, 채널 하나를 만들어 버렸다. 사온 술은 먹지도 않고 그대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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