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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력한 예린이 Oct 27. 2024

대학원생 외동딸의 무게(몸무게 포함)

    외동이면 어릴 때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혼자 지내면 외롭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일단,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심심할 틈이 없었다. 첫째, 있었던 적이 없던 형제자매는 그립지가 않았다. 항상 혼자 잘 놀았고, 혼자가 편했다. 둘째, 엄마 아빠가 나만의 훌륭한 친구였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나보다 더 잘 알아주시는 두분 덕분에 매일 매일이 신나는 일 투성이었다. 30대 초반인 지금도 매주 주말이면 은근히 나를 찾는 두분이계셔서 비어 있는 스케줄에 외로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 나는 사랑 담뿍 받는 외동딸이다. 


    대학원 후기 입학(2학기에 하는 입학)을 앞둔 2019년 여름은 예년보다 장마가 짧았고 그만큼 더위가 빠르게 찾아왔다. 그래서, 집에서 쉬는 것이 상책인 시기였지만 아빠께서는 신기한 제안을 하나 하셨다. 입학 전까지 주말마다 서울 방방곡곡을 함께 여행하자는 것이었다. 더위에 유독 약하고 우리 집 대표 집순이인 엄마도 이번 계획만큼은 의지가 넘쳐보이셨다. 연남, 이태원, 잠실, 인사동 등에 위치한 서울의 랜드마크는 모두 다녔고, 골목마다에 자리한 맛집과 카페도 이곳 저곳 찾아다녔다. 두분께서는 피곤하실 법도 한데 한주도 빠뜨리지 않고 입학 전까지 서울투어를 함께 해 주셨다. 


    석사과정 중반 즘 주말여행의 참 이유를 알게 됐다. 그전까지는 대학원에 입학하면 바빠질테니까 가족끼리의 시간을 많이 갖는 줄로만 알았다. 연구실에 소속되어서 학회에 다니거나 프로젝트 일을 하게 되니까 서울 여기저기를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당시에는 자차가 없어서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했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는 날이 있었다. 미팅 시간은 다가오는데 늦을까봐 걱정됐던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보같이 길을 못 찾겠다고 말씀드리자 일단 택시를 잡고나서 통화하자고 말씀하셨다. 택시 안에서 기사님께 양해를 구한 뒤 다시 아빠에게 전화했다.



“아빠, 고마워. 근데 아까는 진짜 어떻게 가는지, 지도를 봐도 모르겠더라니까.”


 “당황할 수 있지. 아까 거기서 회의장소 가려면 
 너 그때 엄마 아빠랑 갔던 0000몰 기억나? 거기서 길 건너 방향에서 오는 버스타면 돼.
 그리고, 집에 다시 돌아갈 때는 그 뇨끼 먹었던 000식당 근처 역에서 지하철로 가.”



    이제 막 서울살이를 시작한 딸이 걱정되셨던 거다. 우리 딸이 길을 몰라 헤맬까봐 서울여행을 계획하신 거였다. 회의때문에 울면 안 됐는데 도륵 도륵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혹여, 서울에 대해 너무 모르는 티가 나서 누군가에게라도 무시당할까봐 랜드마크며 동네 대표 맛집까지 모두 데리고 다니신 거였다. 참기 힘들만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빠에게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 무게가 온전히 느껴져서 마음이 아릴 정도였다. 


    엄마만의 사랑방식은 조금 유별난 편이다. 언제 어디서나 당신 딸이 예쁨 받기를 원하신다. 그래서인지 내 몸무게에 유독 관심이 많으시다. 하지만 대학원생 기간만큼 평생 이토록 관여하신 적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살이 찌면 단번에 알아채셔서 귀찮기도 했다. 그때마다“살이 좀 찐건가?”라며 예민한 딸 신경 건들일까봐 걱정하시면서 직설적으로 묻지도 못하고 얼버무리시곤 했다. 


    엄마는 ‘물심양면’전략을 선택하셨다. 고칼로리 간식대신 단백질 간식을 자취방 주소로 배달시켜 주셨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셨는지 식사대용 쉐이크를 맛별로 주문해 주셨고, 효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믿고 먹어보라던 체지방 감량 보조제도 사 주셨다. 운동기구도 여러 번 보내주셨다. 자취방에서 층간 소음 없이 할 수 있도록 스텝퍼와 바닥깔개를 함께 구매해 주셨고, 넘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할 수 있는 밸런스 기구도 주문해 주셨다. 아직 다 먹지도 못했는데, 몇 번 써보지도 않았는데 자꾸 쌓이기만 하는 엄마의 관심에 부담이 커졌다. 동시에 반항심도 커졌다. 그렇게 석사기간 동안 자극적인 배달음식으로 꾸준하게 찌운 살은 학위논문을 쓸 때 즘 정점을 찍었다. 


    그러다 문득 진짜 살을 빼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던 날, 엄마가 보내주신 택배 중 하나를 그제야 뜯어보았다. 택배에 담긴 물건마다 작은 메모지를 붙여 손편지를 써 놓으신 걸 보았다. 못된 딸은 신경질까지 났다. 엄마는 왜 이렇게 나를 잘 해주기만 해서 부담을 갖게 하는지, 왜 이렇게 나한테 많은 걸 해줘서 부채를 갖게 하는지, 속이 상했다. 



“곧 학위논문 심사인데 교수님들께 예쁘게 보여야지. 우리 딸, 할 수 있다!”



    엄마는 줄곧 딸의 모습이 아니라 명함을 걱정하신 거다. 본인 딸이 학부가 부족하니, 보여지는 모습이라도 게을러 보이지 않게 정돈되어 있길 바란 것이다. 어디서든 학부출신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학계에서 우리 딸이 기죽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셨을 거다. 엄마께서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지만 세상의 시선을 바꾸는 것은 어려우셨을 테다. 그 마음을 다 느끼고 나니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부터 열심히 식단조절과 운동을 했고, 건강한 몸을 되찾았다. 


    어른이 되면 엄마가 좋은지, 아빠가 좋은지에 대한 질문에 어느 정도 답할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아니면 어떤 시기는 엄마가 좋았고, 다른 시기에는 아빠가 좋았다고 답을 내릴 수 있을 줄 알았다. 30대 초반인 지금도 나는 두 분이 똑같이 좋다. 나를 사랑해주시는 방식이 너무도 달라서, 어떤 방식이 더 좋다고 고를 수 없을 만큼 두 사랑 다 너무 커서 고를 수가 없다. 대학원 생활을 경험하면서 분명하게 알게 된 사실은 두 분의 무한한 사랑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며 열심히 나의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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