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iss you!!! 당신이 보고싶어!!!"
Miss는 ‘놓치다’라는 의미가 ‘보고싶다’는 의미로 확장된 단어다. 소중한 사람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만이 단어에 담긴 감정까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얼마나 상대가 소중한지, 평소 얼마나 자주 봤는지에 따라 닿을 수 없는 현실이 더욱 아쉬울 것이다.
외향적인 성격에 비해 따로 만남을 가질만큼 친한 친구는 없는 편이다. 심지어 연이은 대입 실패를 계기로 19살 이후로 오랜 기간 동안 숨어버려서 연락이 닿는 고등학교 친구는 아예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인생에서 ‘친구’라고 지칭하고 추억을 쌓은 사람들은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만난 사람들이 전부다. 그 중에서도 고추장 패밀리와 MJ언니는 퍽퍽했던 20대를 버티게 해준 은인 같은 인물들이다.
요즘 나는 ‘고추장 패밀리’가 유독 보고싶다. 박사 학위논문을 쓰는 시기여서 그런지, 더욱 그렇다. 우리는 석사과정 내내 함께 했던 친구 그룹이었고, 나의 대학원 생활 중에 이들과의 추억을 들어내면 남는 게 많이 없을 정도다. 두 사람은 국내에서도 하기 어려운 박사과정을 미국으로 하러 떠났고, 같은 시기에 두 사람이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에 나에게 고추장패밀리의 빈자리는 두배로 크게 느껴졌었다.
<고>는 우리나라 최고의 고등학교와 최고의 대학교를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대한민국 수재다. 그녀가 학창시절 줄곧 공부를 잘 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똑똑한 머리만큼이나 무거운 엉덩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한국 교육시스템에 최적화된 호모스터디우스(공부인간)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학교의 기준은 나에게 있다. 그런데 뭐,, 누구라도 반박은 어려울 것 같다. 여지는 남겨두기 위해, 반박 시 님말 다 맞음)
<장>은 외모만큼이나 예쁜 마음씨를 가졌다. 내가 살고 있는 곳과 가깝게 자취방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는 대학원 석사 시절 동안 함께 많은 추억을 쌓았다. 그녀는 천재 남자친구와 오랜 연애를 했고, 석사 학위논문을 쓰는 과정 중에 결혼했다. 논문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벅차했던 내 옆에서 학위논문・연구실프로젝트・결혼식 준비까지 성공적으로 해낸 그녀가 마치 신처럼 보였다.
나와 <고>, <장>이 모여 스터디그룹을 만들었고, 그 이름이 <고추장>이었다. 우리는 내 자취방을 아지트 삼아 자주 모여서 조금씩 공부하고, 많이도 떠들었다. 얘기하면서 발전시킨 수업과제로 연구를 진행했고, 우리는 2021년 00학회 동계 학술대회에서 포스터 최우수상을 받았다.
<고추장> 패밀리와의 기억을 돌이켜보니, 그들과의 추억 속에는 즐거움도, 기쁨도, 슬픔도, 서로를 향한 질투까지도 모두 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했던가. 우리는 셋이어서 더 완벽했다. 그 완벽함을 더 잘 기억하고 싶어서 억지 좀 부리려 한다. 도대체 무슨 비유인가 싶겠지만, 내가 그녀들과의 지난 시간들을 예쁘게 포장하고 싶은 마음이고 표현이다.
우리에게 <고>의 지구력이 없었다면, 우리의 아이디어를 제때 연구화 시키지 못했음을 후회했을 것이다. 영토 확장에 실패한 어느 무리의 <추장>과 같은 모양새였을 거다.
우리 중 <추>의 창의력이 없었다면, 마땅한 연구아이디어가 없어서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함께 성장할 기회는 얻지 못한 채 <고장>나 버렸을 것이다.
우리에서 <장>의 실행력이 없었다면, 합동연구는 시작도 못해봤을 것이다. 고추장의 핵심재료인 <고추> 없이 어찌 장을 담글 수가 있겠는가.
이해하셨겠지만, 창의력이 풍부한 <추>는 나다.
MJ언니는 대학교 동기로 거의 10년째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연락하고 만남을 갖는 사람은 내 인생에서 언니가 유일하다. 그래서 정정하자면,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기 보다는 내가 일방적으로 많이 의지하는 관계다. 언니께서도 싫지 않으신지 그래도 오래 오래 받아주고 있다. 시간대를 불문하고 언니가 생각나면 ‘언니 머해’, ‘언니 보고싶어’를 남발하는 내 카톡에 바로 답장하지는 적은 매우 드물지만, 꼭 따뜻한 답장을 보낸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힘든 건 없는지 걱정도 해주고, 내 투정이 과할 때면 적절히 무시하면서 지금 하는 고민이 별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언니가 유독 특별해진 계기는 쫓기듯 어딘가 매일 바빠보였던 학부생 시절을 유일하게 이해해줬던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학과 내에서 몇몇 선배와 동기들은 나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도대체 학과 생활을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여도 내 모습이 유난스러워 보여서 싫어했을 것 같았는데, 언니는 달랐다.
목표가 있는 동생을 묵묵히 응원해줬다. 23살에는 수능, 24살에는 캠퍼스 이동, 25살에는 조기졸업과 대학원 입학을 준비했던 나는 연초마다 언니를 붙잡고 인생계획을 브리핑했다. 매년 갖가지 방법으로 대학교 탈출을 꿈꿀 때마다 언니는 무조건 할 수 있다고 믿어줬다.
저 중에 제대로 이뤄낸 것은 25살의 목표밖에 없다는 사실이 신기할 만큼 저 시기는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졸업준비와 입학준비를 동시에 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시간이 정말 부족했다. 갑자기 내가 두문불출하는 날들이 많아졌고, 그만큼 언니도 갑자기 혼자가 되는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물론 언니는 동기들의 신임과 애정을 잔뜩 받던 사람이어서 나 말고도 찾는 이가 또 있었을지 모르지만, 나의 갑작스러운 거리두기는 어느 정도 언니에게도 서운했을 것 같다.
대학원 진학 준비 막바지에는 연락도 잘 안 했다. 심지어 첫 번째 대학원에서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도 공유하지 않았다. 서울대가 목표였는데 미리 이런 소식을 외부에 전하면 뭔가 기운이 새나갈 것 같은 기분이라 함구했다. 대충 언제쯤 결과발표가 된다는 사실을 언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묵묵히 기다려주었고, 서울대에 합격한 날 내 자취방 앞에서 만나 얘기를 나눴다.“예린이 너는 어떻게든 해낼 것 같다”며 드디어 이뤄낸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내향형에 가까운 언니가 그 정도 반응을 해주는 것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앞으로의 인생 동안 언니의 성공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 누구보다 더 기뻐해야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