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어디 나오셨어요?”
“어,, 저,, 박사는 서울대 다녀요.”
“헐! 공부 엄청 잘하시나보다!”
“아,,하하하하핳핳,,아니에요,,”
마지막 대답은 이전 것보다 0.5초 늦게 답했다. 이건 겸손해 보이기 위한 기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머리 속을 흩뜨리고 있는 수많은 핑계와 변명 사이에서 적절한 대답을 찾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다. 인사 치례로 출신 대학교를 물었을 뿐인데, 그 간단한 질문에 무려 10년치의 인생을 돌이켜보던 나의 뇌는 ‘아니에요’라는 짧은 문장으로 답을 건냈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서 박사까지 할 정도면 공부를 엄청 잘 할 것이라는 당연한 인식을 제대로 부정한 셈이었다. 마지막 대답 후, 내 모습은 더 더욱 겸손 떠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하하하하핳핳’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던 이유는 하나다. 서울대 박사라는 타이틀을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않은 채 칭찬하는 상대의 순수한 태도에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분명 박사‘는’서울대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그에게 나는 성실한 공부천재가 된 것을 느꼈다. 나는 대학원만 서울대로 다닌 <반쪽짜리 서울대생>이기 때문에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가기가 싫었다. 학부도 서울대를 나왔는지, 서울대가 아니라면 어디 대학교를 졸업한 것인지 나라도 궁금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후를 상상하다가 다음 질문이 들어오기도 전에 미리부터 얼굴이 빨개진 상태로 시선을 피하는 것이 그때의 최선이었다.
학벌지상주의가 강한 한국에서 학력칭찬을 듣고 도망치고 싶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얻게 된 사회적 지위가 나를 평가하는 중요한 가치가 되는 순간에 맘껏뽐내고 싶은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학벌로서 나를 설명해야 할 때일수록 지상주의의 편협함을 몹시 체감하는 편이다. 평생 열심히는 공부했는데, 그래서 서울대를 어떻게든 오긴 왔는데, 남들이 인정할 만한 대학교 학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을 길게 겪고 23살에 입학한 학교는 지방 소재 대학교였다. ‘지방대’를 이런저런 포털사이트에 검색해보면‘대박’, ‘행복’, ‘성공’등의 긍정적인 단어를 함께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냉혹한 주위의 평가만큼 대학교 학벌에 대한 자존감은 뚝뚝 떨어졌다.
그래서 고백한건데 아까 대답의 솔직한 버전은 이러했다.
“(내가 공부를 잘 한다고 할 수 있나?
나는 창의적이긴 한데 게으르고, 똑똑하긴 한데 성실하진 않고,
그나저나 나는 외고 갈 만큼 열심히는 살았고, 지방대이긴 하지만 조기졸업도 했고,
석사 잘 졸업했고, 박사수료까지 했는데
여전히 지방대 졸업생으로만 나를 소개해야 하나?)
아,, 하하하하핳핳,,아니에요,,”
각자마다 출신 대학교를 갖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최선을 다해 수능을 잘 봐서 명문대에 갈 수도 있고, 누군가는 대학교를 입학 혹은 졸업하지 않은(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학벌에 대한 사견을 먼저 설명하고 싶다.
일단, 좋은 학벌을 동경했다. 명문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 여러 번 수능을 봤고, 유명 재수학원을 다니면서 공부도 해봤고, 인강 프리패스는 회사마다 모조리 사서 들어봤을 만큼 수능에 진심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19살부터 22살까지 온 가족의 바램은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 하나일 정도였다. 4년 동안 내게 11월은 생일이 있는 달로 설레기 보다는 수능때문에 긴장만 가득한 시기였다. 지금도 11월이 되면 수능시험 날에 느낀 처절함이 어제 일처럼 상기되기도 한다. 현재 박사수료까지 마치고 졸업논문으로 정신이 없는 나날을 보낼 수 있어서 망정이지,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취업했다면 자주 서점에 들러 수험서를 구매하고 귀가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해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수능대박을 위해 낭비에 가까운 맹목적인 투자를 할 게 뻔히 상상될 정도다.
지방대를 <입학>한 사실은 나를 죄스럽게 만들었다. 지방대 출신으로서 죄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이 스스로도 너무나 불쾌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이다. 학벌주의 관점에서 지방대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듯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지방대를 <졸업>하면서 경험했던 것은 무거운 죄책감을 덜어내는 과정이었음이 확실하다. 대학교에서 총력을 다해 학습한 전공지식 공부를 시작으로 현재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 대학교 조기졸업이라는 경험을 바탕으로 뭐든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충전했기 때문이다.
(모든 지방 소재 대학교가 설명한 바와 같다는 것은 절대 아니며, 개인의 상황에 따라서 지방대에 대한 해석의 여지가 분명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싶다. 다만, 나의 경우 성실하지 못한 고등학교 생활로 연이은 대입실패를 했기 때문에 위 문단을 작성했다.)
거창하게 포장해가며 나의 배경을 설명했지만, 대학교를 밝히는 사실이 때때로 부끄러울 때가 있다. 억지 비유를 해보자면, 출신 학교를 고백하는 것은 마치 타인에게 나만 알고 있는 내 범죄사실을 알리는 듯한 기분과 비슷할 것이다. 나의 과오가 창피하기도 하고, 나를 보는 시선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니 걱정도 되니 말이다. (참고로, 나는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어 진짜 비유일 뿐이다.) 이 둘의 차이가 있다면,‘대학 콤플렉스’의 형기는 내가 정한다는 사실이다. 법도 사회적 시선도 아니다. 대학 이외의 가치를 기준으로 오롯이 나를 사랑할 수 있을 때 내가 내린 형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반쪽짜리 서울대생>은 석사학위를 서울대에서 받아놓고도, 연수로는 6년째 서울대를 다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서울대생이라고 인정해주지 않는 나의 모습이 아이러니해서 시작된 글이다. 이 글을 완성하며, 어제를 살피고,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꿈꾸며 반쪽이 아닌 완전한 나를 만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