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내 인생의 최고황금기
벼랑 끝에서 쓰는 글, "존재해 줘서 고마워."
1학년인 딸아이가 같은 학교/같은 아파트인 5학년 언니 A를 아주 잘 따른다.
'남동생 알레르기'가 있는 그 아이도 우리 아이를 예뻐해 주고 둘이 쿵작이 잘 맞아 가끔 만나서 같이
공부도 하고 시간을 보낸다. 어젠 그 모녀 포함해, 세 엄마가 아이들 넷을 데리고
고양이가 있다는 만화책 카페에 갔다가 어쩌다 보니 A네 집에서 같이 저녁까지 해결하게 되었다.
우리 동을 나서 A네 집으로 다 같이 가는데,
1층에서 4살 즈음의 너무 귀여운 여자아이를 만났다.
모르는 사이인데 깜찍하게 인사를 하기에 입을 헤벌쭉 벌리고 엄마미소를 짓고 있다가 뒤돌아봤더니
나보다 예닐곱 살 많은 A의 엄마도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B(내 딸)가 우리 딸 어릴 때 떠오르게 해서 너무 예뻐~ 내 딸이 딱 고만할 땐 애 예쁜 거 모르고 키웠지.
8살보다 더 어린 애기들 보느라 눈 돌아가서 말이야. 그런데 또 지나고 보니
일곱 살, 여덟 살도 너무너무 예쁜 나이잖아?"
맞다.
나는 지 똥꼬도 닦을 줄 알고, 스스로 책도 읽을 줄 알고, TV 리모컨 조작도 할 줄 알지만 아직 사춘기에는
접어들지 않아 엄마, 아빠 무서운 줄은 아는 너무도 귀여운 나이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내 인생의, 나와 남편 인생의 황금기였다.
이걸 다 지나버리고 나서야 깨달으면 대체 무슨 소용인가.
나도 가끔씩 이 마음가짐을 다잡으며 아이한테 사랑한다고 한번 더 말해주고, 한 번 더 눈 맞춰주고,
한번 더 놀아주려고 하지만, 이 얄팍한 다짐은 내 한 몸 피곤하고 귀찮을 때마다(그런 일이 아주 비일비재함)
금세 깨지곤 하니 이 어찌 통탄할 만할 일이 아니냐 이 말이다.
TMI지만 우리 가족은 현재 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서있다. ㅠㅠ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원동력이 되어 남편은 평생 멀리 했던 책을 읽기 시작했고, 결혼 10년 차... 그동안 말로만 다짐했던 운동을 다니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 나름 둘 다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
다행히 외동아이 하나뿐이라 어떻게 어떻게 밥 굶지 않고 살고 있지만,
또 이 아이 덕분에 모든 것을 버티고 있다.
우리가 만약 이 벼랑 끝 상황에 똑같이 놓여있지만 나이가 지금보다 5살, 10살 더 들어버린 마흔 중반에서 후반이었다면 도대체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우리 부부는 85년생, 아직 만으로 37살이다.
대한민국 평균수명이 2021년 기준, 여자 86세, 남자 80세로 평균 83세란다.
우리가 별일 없이 평균까지 수명을 채운다고 가정하면 83-37=46,
46년을 더 살 거란 이야기가 된다.
실로 엄청나다.
인생은 장기전이다.
카르페디엠은 진리지만, 욜로족은 솔직히 너무 갔고, 적당히 일상에서 반짝이는 행복을 즐기며 살아야 장기적으로 볼 때 인생의 목표라든지 진부하지만 자아실현도 해가며 더 행복하게 오래 살 수 있다.
김신지 작가님이 매일매일 '행복의 순간'까지는 되지 못하지만
'행복의 ㅎ'정도 되는 순간들을 그러모으며 산다는 글을 쓰셨다.
'행복해죽겠어!'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일매일 그날 밤에 하루를 뒤돌아보면 그날 하루 동안,
ㅎ을 여러 번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그 ㅎ은 삼일째 못 쌌던 똥이 시원하게 미끄덩 빠져나온 순간일 수도 있고 (식사 중이시면 죄송합니다.ㅋ),
일주일째 방향을 못 잡고 방황했던 기획안의 실마리가 보인 순간일 수도 있고,
한파 속에서도 봄꽃 봉오리가 솟아난 꽃나무를 본 순간일 수도 있다.
나는 ㅎ을 잘 포착하고 그러모으고,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서 내 몸속에 체화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우울과 슬픔도 자주 느끼지만, 반대로 ㅎ도 잘 발견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자주 웃으며, 내 아이와 내 남편과 반짝이는 순간들을 더 온몸으로 느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
'결국은 사랑만이 답'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내 아이와 남편을 사랑하고, 내 일을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 내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그 사실을 사랑한다.
나는 곧 봄이 와서 꽃이 필 거라는 사실을 사랑하고, 벚꽃이 지면 사람들이 내년에도 또 보게 될 그 벚꽃을 더 못 봐 발 동동할 거라는 그 변함없는 사실을 사랑한다. 세상은 아름답지만은 않지만, 어둠과 악마 같은 사람들과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인생이 그저 강물처럼 흘러 흘러가고 순환한다는 사실을 사랑한다.
우리 가족은 자주 힘들고, 서로 싸우고, 셋 다 원하는 것을 다 가지진 못했지만 가진 것도 아주 많다.
서로 사랑하고 아낀다. 이 정도면 됐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같이 잘 버티어 낼 힘이 결국은 우리 가족 안에, 우리 안에 있다는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지금 이렇게 이런 글을 쓰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모든 것이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하면 아무것도 잘못될 것이 없다.
나의 행복은 곧 너의 행복, 너의 행복은 곧 나의 행복.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고 아이를 키워나갈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아이 머리를 빗겨주다가 나를 닮아 조금 도톰하고 복슬한 머리숱을 가진 아이의 정수리에
뽀뽀하고 냄새를 킁킁 맡는 그 순간이 너무 ㅎ스럽고 사랑스러워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ㅇㅇ야, 사랑해. 존재해 줘서 너무 고마워."
아이가 답했다.
"엄마. 나도 고마워. 엄마가 존재해 줘서."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동그랗고 한없이 보드라워 보이는 두 볼살이 양쪽으로 슬며시 당겨지며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