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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 윤 Mar 30. 2020

빨래를 널다

그곳에서 달팽이를 보며 느림의 미학을 배운다.

   나는 흙냄새가 좋아 단독주택에 살고 있다. 비 내리는 날이면 땅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구수하다. 약간 비릿하면서도 쾌쾌한 먼지 냄새지만 구수한 고향 냄새와 닮았다. 어제 종일 비가 내리더니 감나무 어린잎이 제법 파릇하게 생기를 찾아 반짝거린다. 담 너머 세상구경 나선 장미도 수줍게 부풀어 올라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려 실실거리며 웃는다.   


   빨래를 탈탈 털어 넌다. 햇살에 맘이 달아날까 집게로 양쪽을 집어둔다. 하루하루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온 가족들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숨구멍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있던 수고로움을 말린다. 수고했다, 고맙다 다독이며 옷들을 스윽 한 번 쓰다듬어 본다. 바람의 간지럽힘에 어제의 아픔도 잊고 온 몸으로 웃는 빨래들. 밤새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 준 이불도 하늘을 보며 기지개를 편 듯 일렁거린다.    


  내가 단독주택을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런 한가함이다. 빨래를 널어놓고 다시 돌아서 한 참을 바라본다. 가끔 이 뽀송뽀송 말라가는 저 옷가지들을 보면 울컥 해 질 때가 있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와 어울리면 더 없이 행복감마저 들게 한다. 햇살이 담에 부서져 내릴 때 잠시 여기가 무릉도원이 아닐까 하는 희열감마저 느껴진다. 아파트라고 빨래 널 곳이 없는 것도 아니고, 꽃들을 둘 곳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살아 본 그 곳의 기억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닐 때는 아파트에 살았었다. 경기도 산본. 남편의 직장을 따라 간 곳이었다. 삼십 년 만에 고향을 떠나 시작한 객지 생활이었다. 가까이 언니가 살고 있어 외롭지는 않았다. 주말이면 언니 네랑 주말 농장에 가서 고추며 여러 가지 푸성귀들을 키우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 친구 엄마들과도 가깝게 지내며 그 곳의 생활은 즐거웠다.    


   즐거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파트 층간 소음 문제가 나에게도 다가왔다. 아래층에 육십 대 부부가 살았다. 그 분들은 수시로 인터폰으로 우리 걸음걸이를 간섭하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소리가 우리에게는 소음이 되어 들릴 정도였다. 아래층 아저씨는 개인택시를 운행했다. 밤낮없이 피곤 할 때 집에 들러 쉬어야 하기 때문에 조용히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 네. 아이들이 어려서 조심 시킨다고 시켜도 그러네요. 죄송합니다.”  처음에는 웃는 얼굴로 무조건 사과부터 했다. 날이 갈수록 갈등은 골이 생기기 시작했다. 활동성 좋은 아이들에게 언제나 조용히 하라는 것은 고문 이었다. 이방에서 뛰지 말라고 이야기하면 맑은 목소리로 “네! 요리 하면 되지요?” 하며 까치발로 뛰어가는 아이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층간 소음의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깊은 골이 터지기 전에 우리는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몇 년 비운 내 고향은 따뜻했다. 본 고향은 아니지만 직장인이 되고부터 살아온 곳이다. 가끔 삼사일을 여행하고 돌아와도 내가 살던 곳이 반갑고 조금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 그런데 삼 년 만에 돌아온 이곳은 포근했다. 남의 일처럼 느꼈던 이웃 간의 말없는 다툼으로 멍들었던 나를 꼬옥 안아주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우리는 단독주택을 택했다.


   차 한 대 겨우 들어 설만한 작은 마당에서 나는 삶을 배운다. 절기가 빠르다고 투덜거려도 철에 맞추어 피어나는 꽃들에게서 자연의 섭리를 감탄하고, 이른 아침 왱왱거리며 날아와 부지런히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며 꽃가루를 모으는 벌에게서 부지런함을 배운다. 보이지 않던 달팽이들이 어느새 마당 한가운데에 나와 있는 모습에서 느림의 미학을 느낀다. 케일 잎사귀 뒤에 몰래 숨어 알을 낳고 그 곳은 보지 말라고 나를 유혹하며 살랑거리는 나비를 보면 모성과 지혜를 생각하게 한다.     

  

  단독주택은 손이 많이 가긴 한다. 비오는 날이면 수채 구멍 막힐까 수시로 마당을 쓸어야하고, 겨울이면 춥고, 여름이면 모기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손바닥만 한 마당 빗자루로 휘휘 쓸고 돌아보면 상쾌하다. 우리에게 마당의 대부분을 양보하고 한편으로 가로 질러 있는 빨랫줄을 지켜주는 지렛대. 그 위에 앉은 잠자리, 이름 모를 새들과 종종거리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참새들의 모습이 주택에 살며 느끼는 힘듦 뒤의 보상이다.    


  이 행복한 햇살이 슬프다. 한가롭던 골목이 술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이십년을 살고 있는 이 집도 재개발의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2020년 5월 이 집과도 이별이다. 주택의 개념이 아파트로 변해가는 것 같아 씁쓸하다. 저 하늘 향해 얼굴을 내밀고 일렁이는 이불과 옷가지들, 아침마다 마실 오는 새들, 봄이면 한가하게 산책 오는 나비들, 다 어디로 이사를 보내야 할지 맘이 아련하다. 어디든 정 붙이면 살겠지만 이만한 곳이 있을까하는 생각에 먹먹하다. 이 우울한 마음을 마당 한 가운데 펼쳐진 파라솔 아래서 라디오를 들으며 햇살에 말리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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