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의 다이어리를 무심코 열어 보니 올해도 한의원에 다닌 날이 빼곡하다. 까만 동그라미로 표시된 날들이 내 몸의 연대기를 말해주는 듯하다. 어떤 날은 허리가 아파서, 어떤 날은 발목이 아파서, 또 어떤 날은 그저 온몸이 쑤셔서 찍어놓은 점들이다.
오늘도 한의원에 갔다. 한의사 선생님이 내 발목을 잡는 순간,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는 선생님이 찌르는 바늘의 아픔을 감추기 위해 나는 두손으로 얼굴을 부여 잡았다. 며칠 전 수영장 계단을 오르다가 삐끗한 왼쪽 발목 때문이었다. 다들 운동하라고 해서 시작한 수영인데, 이게 웬일인가. 선생님은 "발목이 아픈 게 아니라 허리가 문제"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는 쌀 한 포대를 들다가 허리가 나가 통증의학과를 전전했었지.
쿠팡으로 배달된 10kg 쌀 한 포대를 들고 올라가다 그만, '억'하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부터였다. 허리 통증이 시작되어 한동안 병원을 다녔다.
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의 40대는 온통 아픔의 시간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늘 아프다고 하시는 엄마가 조금 야속하기도 했다. 왜 그렇게 자주 아프시나, 왜 조금만 힘들어도 쉬어야 하나. 그때는 몰랐다. 지금의 내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엄마처럼은 아프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마흔 되기 전에 염소고기를 세 마리나 먹었다. 그게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듣고서였다. 영양제도 부지런히 챙겨 먹었다. 아침마다 쟁반에 가지런히 놓인 영양제들. 비타민, 칼슘, 마그네슘, 오메가3, 프로바이오틱스... 하지만 몸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 길을 간다.
중학교 3학년,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그날 나는 복막염 수술을 받았다. 다른 아이들은 놀이동산에 가고, 맛있는 것을 먹을 시간에 나는 수술대에 누워있었다. 한의사 선생님은 그때의 상처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장기가 오른쪽으로 눌리고 왼쪽이 늘어났어요." 그 말을 들으니 왼쪽 다리의 잦은 통증이 이해되었다. 운전할 때마다 다리를 올리고 내릴 때의 그 찌르는 듯한 통증도.
30대까지는 정신력으로 버텼다. '아프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면 정말 아프지 않을 것처럼.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늘 괜찮은 척했다. 하지만 40대의 몸은 더는 정신력만으로는 견딜 수 없다는 걸 가르쳐주고 있다. 피곤하면 온몸이 쑤시고, 조금만 무리하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른다. 마치 유리로 된 몸처럼.
갑상선도 의심해 검사도 했었다. "피곤하고 아프다"는 말에 의사는 "나이가 들면 다 그렇죠"라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아픈 게 정말 당연한 걸까.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피로감은 계속된다. 그저 타고난 연약한 체질을 인정하는 수밖에.
이제는 안다. 엄마가 왜 그렇게 자주 아프다고 하셨는지. 왜 조금만 힘들어도 쉬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를 키워내셨는지. 아마도 지금의 나처럼, 아플 때는 아프다고 말하면서도 꾸역꾸역 일어나 하루를 살아내셨겠지.
아픈 게 서러워 울기도 했지만, 이제는 이런 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때로는 내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이고, 때로는 그 신호를 무시하면서. 아프다고 해서 삶이 멈추는 것은 아니니까. 다만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나를 아끼면서 살아가려 한다.
당신도 혹시 이런 하루를 보내고 있진 않은가. 남들에겐 말 못 할 아픔을 안고, 그래도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진 않은가. 그렇다면 오늘은 잠시 쉬어가도 좋다. 우리의 몸이 유리처럼 깨지기 쉽다는 걸 인정하는 것, 그래서 때론 쉬어가도 된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 그것도 하나의 용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