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2020)
〈히든 피겨스〉(2017),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보다는 〈킬 빌〉(2003), 〈퀸스 갬빗〉(2020)이 더 좋다. 모두 능력 있는 여성이 주인공이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다르다. 전자는 여자의 능력을 들러리 세우지만, 후자는 여자의 능력을 전면에 내세운다.
〈히든 피겨스〉는 미국 나사(NASA)에서 일하는 흑인 여성 과학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회사, 자본, 대졸, 남성, 꼰대, 편견, 불의에 맞서 싸운 고졸 여성 노동자들의 유쾌한 분투기를 담았다. 둘 다 훌륭한 영화다. 하지만 서사의 매력이 떨어진다.
〈히든 피겨스〉의 흑인 여성 과학자들은 소련과 경쟁하는 미국 제국주의로부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주인공들은 한국 회사가 외국계 악성 투자자에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민족주의적 자본주의로부터 호명된다. 두 영화의 주인공이 자신의 능력에 걸맞게 대접받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들의 능력이 미국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적 자본주의를 위해 복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어딘가 찜찜하다.
두 영화가 능력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도 문제다. ‘소수자도 능력이 있다, 능력 있는 소수자가 배제되고 있다’는 명제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소수자가 받는 차별을 당연시한다. 능력주의의 강조 이면에는 능력 있는 소수자는 발탁되지만, 그렇지 못한 소수자는 낮은 곳에 그대로 머물러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능력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형성되는지를 질문하지 않는다면, 능력주의는 오히려 편견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
〈킬 빌〉과 〈퀸스 갬빗〉은 다르다. 여기서는 여자의 재능만이 중요하다. 〈킬 빌〉의 빌은 자신을 죽이러 온 여성 킬러 블랙 맘바(우마 서먼)에게 말한다. 너는 여왕벌이라고. 아무리 이를 감추고 살려해도, 태생이 그렇기 때문에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고.
〈킬 빌〉은 여왕벌의 운명을 타고난 블랙 맘바가 자기 운명을 벗어나려 했을 때 발생하는 비극과 그 비극을 바로잡기 위한 블랙 맘바의 싸움을 다룬다. 압도적 재능의 탁월한 여성 킬러라는 설정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직진한다. 〈킬 빌〉의 장르적 쾌감은 특별한 연출 덕이기도 하지만, 선명한 서사 덕분이기도 하다.
〈퀸스 갬빗〉도 마찬가지다. 엘리자베스 하먼은 남자들만이 차지해온 체스 왕좌를 자신의 재능만으로 뺏어온다. 하먼이 남성 체스 선수들을 꺾을 때, 그녀는 단순히 체스 게임에서 이긴 것이 아니다. 하먼의 승리는 그 질서를 만들고 누려온 남성 기득권을 깨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모든 것이 정돈된, 차분하고 권위적인 세계를 뒤흔드는 것으로서 하먼의 승리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히든 피겨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여러 권력의 메커니즘이 복잡하게 얽힌 세상을 ‘현실감’ 넘치게 재현했다. 블랙 맘바와 엘리자베스 하먼이 가진 ‘절대적인 재능’은 흔치 않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킬 빌〉, 〈퀸스 갬빗〉의 서사는 매력적이다. 이들이 ‘여성의 타고난 능력’으로 남성의 세계를 파괴하는 데서 오는 강렬한 쾌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쾌감이 ‘영화적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킬 빌〉, 〈퀸스 갬빗〉의 서사는 더 많아져야 한다. 영화적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누군가 이를 '현실'로 꿈꾸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영화, 드라마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