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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Dec 20. 2020

아메리칸드림과 '선택' 그리고 젠더

넷플릭스 영화 〈힐빌리의 노래〉(2020)

  미국 자본주의 정신의 상징과도 같은 아메리카 드림이 과연 지금도 잘 작동하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미국 사회가 공정하고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메리칸드림을 긍정한다. 반면 양극화로 공정한 기회가 사라졌다고 보는 사람은 아메리칸드림을 부정한다. 영화 〈힐빌리의 노래〉는 아메리칸드림을 그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긍정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영화의 주인공은 J. D 밴스다. 시골 마을에서 자란 그의 할머니는 사랑하는 남자와 도망쳐 그의 어머니를 낳았다. 할머니는 함께 도망친 남자와 오랜 시간을 행복하게 보냈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종종 폭력을 휘둘렀고, 그럴 때마다 그들의 딸 베브는 두려움에 떨었다.


  J. D 밴스의 어머니 베브는 형편없는 삶을 산다. 시도 때도 없이 남자를 바꾸고 마약에 손을 댄다. 학교에 다닐 때는 전교 2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불안, 무엇보다도 강력한 흡인력을 지닌 ‘보편적인 여자의 삶’을 비껴가지 못했다. 누군가 그녀를 믿고 지원해줬다면 달라졌겠지만, 그녀 주위엔 그런 사람이 없었다. 그런 베브 아래서, J. D 밴스와 그의 누나 역시 똑같은 운명을 걸을 판이다. 폭력적인 할아버지의 유산은 수십 년을 거쳐 손주들의 삶까지 옭아맨 채 놔주지 않는다.


  영화는 성인이 된 J. D 밴스의 삶과 그의 유년기를 교차하며 전개된다. 이를 통해 위태롭고 불안정했던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 그가 예일대 법대에 진학할 수 있었는지, 그는 과연 불운한 과거를 떨치고 좋은 로펌에 들어가 모든 것을 반전시킬 수 있을 것인지 등의 물음을 밀도 높게 형상화한다.


  결국 J. D 밴스는 자신을 뒤로 끌어당기는 힘에 굴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성공한다. 핵심은 할머니다. 할머니는 베브로부터 J. D 밴스를 데려와 키운다. 그녀의 엄한 양육 아래 J. D 밴스는 ‘올바른 길’로 돌아온다. 그리고 끝내 “우리의 시작이 우릴 정의하더라도 매일의 선택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명제를 증명해낸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무엇보다 영화가 J. D 밴스와 그의 가족이 겪은 가난, 폭력, 불안을 그려낸 솜씨가 탁월하다. 덕분에 J. D 밴스와 함께 상승하고 하락하며 강하게 몰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아메리칸드림이 아직 폐기되지 않았다고 말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J. D 밴스의 성공은 가족 모두의 자원과 기대를 갈아 넣은 투자의 결과물이다. J. D 밴스가 가족의 불운을 끝낼 구세주로 선정된 이유는 그가 출산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얽매일 ‘위험’이 없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린 건 할머니고, 폭력적인 아버지를 둔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해 인생을 망친 건 그의 어머니 베브다. 베브가 마약으로 곤욕을 치를 때마다 그녀를 돌보는 건 J. D 밴스의 누나다. 하지만 가족의 모든 지원과 자원을 독점하여 성공하는 것은 남자인 J. D 밴스다.


  그 역시 괴로웠고, 상처 받았으며, 어머니를 돌보느라 힘들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남자라는 이유로, 즉 누군가를 돌볼 의무가 '없다'는 이유로, 마음만 먹으면 자기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는 이유로 ‘선택’되었다. 비록 이 상황을 J. D 밴스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영화가 드문드문 ‘불운한 여자의 삶’을 조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매일매일의 ‘선택’으로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명제는 더욱 꼼꼼하게 검토되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메리칸드림의 젠더화된 편향은 반복될 것이다.


  〈힐빌리의 노래〉는 아메리칸드림을 긍정한다. 하지만 이는 표층적 결론이다. 영화에 드물게 흩뿌려진 ‘선택’의 불공정한 조건에 집중하면, 영화가 드러내길 꺼렸던 정반대의 대답을 들을 수 있다. 가난하고 폭력에 시달리더라도 ‘선택’을 통해 삶을 개선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대답 말이다.


  ‘선택’의 조건을 비가시화 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선택은 역설적으로 선택이 불가능성을 증명한다. 〈힐빌리의 노래〉에서는 젠더가 선택의 조건이었지만, 이 목록은 얼마든지 다양해질 수 있다. 때문에 아메리칸드림이 여전히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은 부정적으로 답변될 수밖에 없다. 적어도 〈힐빌리의 노래〉를 텍스트 삼았을 때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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