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wr Oct 17. 2020

구원은 우리 내면에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포즈〉(2019)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일은 무엇일까? 넷플릭스 드라마 〈포즈〉의 주인공 블랑카는 정체성으로 인해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남들과 공유하지 못하는 것, 자신의 가장 빛나는 점도 수치심으로 인해 혐오하게 되는 것이 가장 비참한 일이라 말한다. 〈포즈〉는 그 수치심의 궤적을 좇는다. 그리고 바로 그 수치심으로부터 나다움, 우리다움이 생겨남을 보여준다. 드라마의 무대는 80년대 미국의 퀴어 하위문화 공간이다. 다소 계몽적이지만, 종종 울림이 있다.


  왜 퀴어는 수치심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까? 퀴어 감정이 에이즈, 트랜스섹슈얼·트랜스젠더의 몸을 경유하기 때문이다. '죽음(에이즈)'을 동반한 사랑, '이질감'을 동반하는 몸은 자기혐오의 근거가 된다. 


에이즈 같은 건 없던 때였지. 우린 완전히 자유였어. 사랑도 자유롭게, 섹스도 자유롭게, 거지 같아도 우리만의 아지트에서 게이임을 만끽했지. 그것들은 죽어도 모를 거야. 죽을 걱정 없이 사랑하는 기분이나, 더 끔찍하게는 누군가를 죽일 걱정 없이 사랑하는 기분. 뭐가 더 엿 같은지 모르겠다. 그런 자유를 뺏긴 것과 그런 자유를 모르는 삶. 뭐가 됐든 이제 막다른 길이야.


  게이 남성인 프레이텔이 에이즈로 고통받는 애인에게 건네는 말이다. 에이즈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성소수자 혐오는 이전부터 있어왔지만, 그들은 주류 문화의 틈새에서 자신들만의 아지트를 구축하여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 왔다. 경찰은 시도 때도 없이 단속했고, 사람들은 손가락질했지만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외로운 퀴어들은 비슷한 자들이 모인 이 공간을 '안전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에이즈는 그들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안전한 공간을 죽음의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에이즈 공포는 일상이 되었고, 수많은 친구와 연인이 죽어나갔다. 에이즈는 이미 존재하던 성소수자 혐오의 크기를 압도적으로 부풀렸다. '외부'의 혐오도 문제지만, 내면의 혐오도 문제였다. 게이들은 더 이상 자신을, 자신의 삶을, 삶을 함께 나누는 자들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렇게 수치심이 누적되어 갔다.


  트랜스젠더 여성 에인젤도 괴롭긴 마찬가지다. 길거리에서 성매매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그녀는 트럼프 타워에서 일하는 잘 나가는 백인 스탠을 손님으로 만난다. 스탠은 에인젤을 자신의 세계로 이끈다. 근사한 아파트를 마련해주고, 비싼 선물도 사준다. 스탠은 에인젤이 품고 있는 '낯섦'에 완전히 매료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스탠은 자신이 에인젤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에인젤이 자신의 세계에 있을 때뿐이다. 에인젤을 따라 퀴어 클럽에 따라간 그는 울렁거림을 느낀다. 그는 에인젤의 세계를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를 떠난다. 이후 에인젤은 트랜스젠더임을 숨긴 채 모델 일을 한다. 그녀만의 아름다움을 인정받을 때는 기쁘지만, 그 아름다움의 '비밀'이 탄로날까 두렵기도 하다. 이성애 백인 남성과의 사랑으로부터, 주류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었던 에인젤은 불안을 떨쳐낼 수 없다.


  에이즈로 애인을 잃어 고통스러워하던 프레이텔과 스탠과의 결별로 고통스러워하던 에인젤은 결국 깨닫는다. 구원은 바깥이 아닌 우리 내면에 있다는 것을. 


  '바깥세상'은 퀴어를 포용할 때도 둘 사이의 거리를 완전히 삭제하지 않는다. 그들은 퀴어가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바로 밀어내 버린다. 즉 퀴어는 이성애자와 시스젠더가 허용하는 지점까지만 바깥세상의 일원일 수 있다. '밝고 아름다워 보이는 세상'은 퀴어 내면의 어두움을 감추고 삭제할 때만 그들을 허락한다.


  그래서 우리는 내면에서 구원을 찾아야 한다.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던 것들, 우리를 슬프게 만들고 좌절시킨 것들, 우리가 스스로를 혐오하는 이유였던 것들로부터, 구원은 시작된다. 우리에겐 부정적으로 간주되던 것의 의미를 전유해온 역사가 있다. ‘이상하다’는 뜻의 퀴어queer를 규범적 이성애 정체성, 이분법적 젠더 정체성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전환시켰고, 우리를 향한 모멸을 유쾌한 몸짓과 복장, 말투로 전유해왔다. 퀴어 클럽의 무대에 올라 ‘포즈’를 취하는 드라마의 모든 순간이 그 증거다.


  다시 한번, 우리는 퀴어 수치심을 공유하는 내 옆의 퀴어로부터 구원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 내면에 축적된 부정적인 감정이 개별적인 것이 아닌 체계적·구조적 편견의 결과물이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공유하는 사람끼리 사랑과 이야기를 나눌 때, 개별적 고립은 집단적 저항의 토대로 새로이 거듭난다.


  에이즈로 애인을 떠나보내고 자신 역시 에이즈로 고통받지만 또 다른 에이즈 감염인과 만나 사랑하는 프레이텔로부터, 자기 내면의 아픔과 고뇌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 당당하게 거듭나는 에인젤로부터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퀴어 구원의 가능성은 이미 우리 내면에, 우리가 쌓아온 문화에 깃들어 있다. 관건은 이를 연결하는 일이다. 움츠러든 존재들을 연결하는 일은 어렵고 지난한 일이겠지만,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