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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Jul 11. 2021

오스카 와일드부터 글램록까지,유미주의와 퀴어

영화 〈벨벳 골드마인〉(1988)

  유미주의는 아름다움 그 자체를 추구하는 예술 사조다. 유미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아름다움을 위해 복무한다. 당대의 가장 세련된 무언가를 인공적으로 창조해냄으로써, 유미주의는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여기에 유미주의의 역설이 있다. 아무리 세련되고 멋진 것일지라도 시대가 지나면 유행에 뒤쳐진 구닥다리가 된다. 그러나 유미주의는 이 한계마저도 품는다. 자신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 유한할 수 있음을 받아들임으로써 현재를 더욱 빛내는 것이다.


  유미주의는 대도시의 밤을 닮았다. 어두운 밤에도 대도시는 빛을 잃지 않는다. 유미주의자들은 밤에 밝혀지는 빛의 주인이다. 그들은 인공적 세련미를 담지한 빛을 만들어냄으로써 사람들을 매혹한다.


  하지만 아침이 밝으면 그 모든 인공적인 빛은 광휘를 잃는다. 그 어떤 빛도 태양보다 밝을 순 없다. 태양은 인공적 아름다움에 대한 지난밤의 탐닉을 우스운 것으로 만든다. 밤의 빛에 환호했던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자연스럽지’ 않은 무언가에 열중하던 사람들은 밝고 화려한 태양 아래서 수치심을 느낀다. 영화 〈벨벳 골드마인〉은 이토록 슬픈 유미주의의 역설을 가장 유미주의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수작이다.


영화 〈벨벳 골드마인〉 스틸컷


  영화는 1970년대 영국에서 절정의 인기를 끌었던 가상의 글램록 스타 브라이언 슬레이드의 삶을 다룬다. 그는 공연 중 괴한으로부터 총격을 당했는데, 추후 이것이 자작극으로 밝혀져 큰 지탄을 받았다. 그 공연의 관중이었던 아서 스튜어트는 10년 후 기자가 되어 브라이언의 회고 기사를 쓰는 일을 맡는다. 아서는 브라이언의 주변 인물을 만나며 그의 삶을 조금씩 복원해나간다.


  퀴어 하위문화의 영향 아래서 성장한 브라이언은 시대의 아이콘이자, 스타일이자, '호모'였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브라이언은 한 때 자신이 동경했던 커트 와일드를 만난다. 브라이언과 커트는 과감한 퍼포먼스, 화려한 패션을 창조해냈고,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 주류사회는 그들의 정숙하지 못함을 ‘영국의 수치’라고 비난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최고였다.


  하지만 브라이언과 커트가 구축한 완벽한 이미지의 세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화려한 이미지의 창조자들조차 이내 그 안에서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영원히 시대의 첨단에 선 아방가르드일 순 없다. 시간이 지나면 혁명은 구식이 된다. 계속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사람들은 다른 대상으로 관심을 돌린다. 브라이언과 커트는 자신들이 창조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미지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총격 자작극은 짓눌린 채 소멸하기를 거부한 글램록 스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영화 〈벨벳 골드마인〉 스틸컷


  한편, 아서가 브라이언의 회고 기사를 쓰는 1980년대는 브라이언과 커트가 이미 구식이 된 이후다. 한때 아서 역시 ‘호모’ 소리를 들으며 그들의 패션과 행동을 따라 했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몸에 딱 붙는 옷을 입고 머리에 컬러 스프레이를 뿌리는 아서는 이제 없다. 그래서 아서가 브라이언의 과거를 추적하는 과정은 과거로 흘려보냈던 그의 지난날을 다시 대면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서가 브라이언과 가까워질수록, 그의 과거 역시 조금씩 선명해진다. 지금의 아서는 더 이상 그때와 같을 순 없지만, 그때를 완전히 지우고서는 지금의 아서가 존재할 수 없음도 점차 분명해진다.


  아서는 결국 아무도 알지 못했던 브라이언과 커트의 비밀을 알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런 아서에게, 커트는 오스카 와일드가 사용했던 브로치를 건넨다. 오스카 와일드는 유미주의의 절정을 이끌었던 예술가다. 커트는 자신이 이제 더 이상 유미주의의 기수일 수 없음을 알기에 브로치를 아서에게 넘긴다. 기자로 일하는 아서는 오스카, 브라이언, 커트처럼 유미주의를 이끌 수 없다. 아서가 맡은 역할은 왕좌에 오를 다음 주자에게 브로치를 넘겨주는 일이다. 취재 과정에서 유미주의의 절정에 몰두했던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는 법을 배운 그는 왕관(브로치)을 보관할 자격이 있다. 화려한 과거는 지나가버렸다는 자조 속에서도 미래를 기다릴 줄 아는 아서는 커트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자작극으로 세상에서 사라지고자 했던 브라이언의 절망감은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도리언 그레이는 추한 것을 초상화 속 자신에게 떠넘긴다. 세월이 지나도 도리언 그레이가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건 초상화 속 그가 늙음의 추함을 모두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간은 결국 오고야 만다. 결국 도리언 그레이는 초상화로부터 모든 추함을 한 번에 되돌려 받고 파멸하고 만다.


  도리언 그레이의 슬픈 운명은 오스카 와일드가 유미주의의 한계와 역설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도 추함은 있기 마련이다. 인간은 이미지가 아닌 피와 땀으로 이뤄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영원히 아름다울 순 없다. 현실의 피와 땀이 초상화 속 아름다움을 ‘더럽히기’ 시작할 때 유미주의의 여정은 마무리된다.


영화 〈벨벳 골드마인〉 스틸컷


  퀴어와 유미주의는 여러모로 닮은 구석이 있다.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과 영화의 주인공들이 퀴어 섹슈얼리티를 향유해서만은 아니다. 유미주의와 퀴어는 모두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들에서 벗어나 있다. 유미주의는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퀴어는 인공적인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수행한다. 그리고 둘 다 ‘자연’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당한다(물론 이분법적 젠더와 이성애 섹슈얼리티가 '자연'인 것은 아니다). 이들이 만들어낸 고유한 예술‧삶의 기예는 그것이 놓인 불안정한 토대로 인해 쉽게 무너지거나 사라져버린다. 내부자들이 자기 경험과 느낌을 말하기를 수치스러워하기에 더욱 그렇다.


  이럴지라도, 그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질 순 없고, 없던 것이 될 수도 없다. 피와 땀에 더럽혀진 초상화나마 잊지 않고 간직하는 사람(아서)이 있기 때문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 유산을 1970년대의 영국 글램록으로 확장한 영화 〈벨벳 골드마인〉이 보여준 것처럼, ‘인공적인’ 예술‧삶의 기예는 손가락질받으면서도 당당했던 최전성기의 브라이언처럼 또 다른 대안적 아름다움으로 언제가 다시 샘솟을 것이다. 다시 한번 당당해질 수 있는 순간. 아서가 브로치를 누군가에게 건네는 위해 기다리는 건 바로 이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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