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영화 〈더 프롬〉(2020)
'낙후시키기'는 상대와 우리 사이의 시차를 부각시키는 전략이다. 저들은 뒤처졌고, 우리는 앞서있으므로, 우리가 옳다는 것이다. 낙후시키기는 ‘뒤처진 자들’의 열등감과 ‘앞선 자’들의 자부심을 자극하는 굉장히 효과적인 전략이다. 하지만 항상 옳지는 않다. ‘미개’와 ‘문명’의 시차를 자기 정당화의 기제로 삼은 식민주의의 폭력이 단적인 예다.
성적소수자의 인권은 현대사회에서 낙후시키기의 전략이 가장 널리 활용되는 영역이다. 〈더 프롬〉은 이를 굉장히 전형적인 방식으로 재현했다.
영화는 처음부터 인디애나 주를 뒤처진 지역이라 규정한다. 한물갔거나, 일자리가 없는 배우들은 SNS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이슈를 찾는다. 그러던 중 인디애나 주의 고등학생 에마 놀런이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졸업 무도회 프롬에서 배제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들은 이 이슈에 개입하면 좋은 이미지를 얻어 재기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고 ‘루저’들을 계몽하러 인디애나로 향한다.
처음엔 이기적인 목적이었지만, 몇몇 계기를 거쳐 그들은 진심을 다해 사건 해결에 나선다. 이를 통해 자기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한다. 결국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영화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관록 있는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 유쾌한 서사가 어우러진 기분 좋은 영화다.
이들이 원한 건 성적소수자가 “실패 안 한 기분”으로 살 수 있는 사회다. 혐오, 수치심, 좌절 등을 일상으로 겪는 성적소수자들은 늘 실패했다는 기분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에마에겐 레즈비언도 프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경험,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프롬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경험이 생겼다. 그녀는 앞으로도 성적소수자라는 이유로 종종 실패할 테지만, 항상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더 프롬〉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다시 낙후시키기 전략으로 돌아와 보자. 낙후시키기는 영화가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한 전략이다. 그들은 인디애나 주의 동성애 혐오자들의 모순을 파고들어 그들을 계몽시킨다. 입맛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기독교 교리를 비판하는 장면, 정숙하고 엄숙하기만 한 태도가 어떻게 삶을 옭아매는지를 보여주는 장면, ‘괴물’이 아닌 문화 교란자(cultural disrupter)로서 변화를 만드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한 장면 등은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낙후시키기 전략의 문제점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낙후시키기 전략에는 ‘뒤처진 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뒤처진 자가 없다면 앞선 자, 즉 ‘옳음’을 담보한 자 역시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선악의 구도는 종종 문제적이며 대체로 무책임하다. 인디애나 주의 동성애 혐오자들에게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들 삶의 한 단면일 뿐이다. 동성애를 혐오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모든 삶이 문제라고 규정하는 건 동성애 혐오만큼이나 부당하다.
변화를 위해서는 조금 더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를 너무 쉽게 낙후된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획득되는 ‘밝은 미래’, ‘선함’, ‘올바름’ 등은 반드시 그 대립을 짝으로 지녀야 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동성애 혐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성적소수자 인권 옹호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소리다. 골치 아프더라도 낙후시키기가 아닌 다른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너무 쉽고 단순한 문제 해결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낳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