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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Nov 08. 2020

자신을 긍정한, 어느 트랜스젠더 과학자의 이야기

벤 바레스, 《벤 바레스》(해나무, 2020)

  2017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FTM(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 벤 바레스는 신경아교세포 분야의 세계적인 과학자였다. 그의 자서전에는 과학계에 만연한 성차별에 대한 분노와 싸움의 기록, 트랜스젠더의 삶과 감정, 그가 이룬 과학적 성과, 젊은 과학자가 성장하도록 돕는 즐거움 등이 담겨있다. 하지만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과학자 벤 바레스’의 서사였다.


나는 MIT를 정말 좋아했다. 타고난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때와 달리 MIT와 잘 맞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과학밖에 모르는 미련한 공붓벌레였다. … 어떻든 나는 과학에 대한 깊은 열정을 가지고 MIT에 입학했고 같은 마음으로 졸업했다. 결국 중요한 건 그거니까.


  책에는 벤이 과학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오랫동안 공부와 일만 해온 벤은 몇 년 만에 휴가를 떠났다. 첫날에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누워 잠만 잤고, 두 번째 날에는 간만의 여유를 만끽하며 바닷가를 거닐었다. 그러던 중, 산책을 시작한 지 불과 15분 만에 자신이 있을 곳은 실험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비행기 티켓을 끊고 연구실로 돌아갔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짧은 벤의 휴가에서 과학을 향한 그의 설렘과 기쁨, 열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과학은 벤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벤은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성 정체성이 야기한 혼란으로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를 만나 상담을 했다(물론 트랜스 정체성 때문에 우울하다고 말하진 않았지만/못했지만). 의사는 벤에게 ‘사랑하는 능력이 없다’고 단언했는데, 그 말에 벤은 또다시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언제나 그랬듯이 일에 파고드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가 평안을 찾은 ‘일’은, 당연히 과학이었다.


  과학을 사랑하는 마음은 과학계의 성차별을 인식한 계기이기도 했다. 여성과 남성 모두로 과학계에 몸담았던 그는 과학적 성과가 젠더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부당한 일이었다. 순수한 학문적 열정이 부당한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그는 그때부터 싸움을 시작했다.


  요컨대, 과학은 그의 정체성이자 삶, 그리고 꿈이었다. 그를 진정으로 행복하고 불행하게 만든 모든 것이 과학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에게 트랜스젠더 정체성보다 과학자 정체성이 훨씬 더 중요해보였다. 벤의 트랜스 정체성을 평가절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벤이 과학을 자기 언어로 삼음으로써, 여성·트랜스젠더가 겪는 문제들에 단단하게 대처해나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벤의 서사에서 ‘자기 언어를 갖는다는 것’의 강력한 힘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프로젝트가 차례로 하나씩 실패했다. … 그날 밤 집으로 걸어가면서 인생 처음으로 어쩌면 내가 과학자가 될 자질이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영혼이 파괴될 지경이었다.


  그가 ‘영혼이 파괴될 지경’에 이른 순간은, 자신에게 과학자의 자질이 없을 수도 있다고 의심한 순간이었다. 그의 위기는 남들로부터 오지 않는다. 그의 위기는 과학을 향한 자신의 믿음이 흔들릴 때에만 온다. 즉, 벤 스스로가 흔들리지 않는 한, 과학이 그를 배신하지 않는 한 벤에게 위기는 없다.


  그랬기에 그는 단단할 수 있었다. 남이 자신을 규정하게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한 과학으로만 스스로를 평가했다. 과학은 종종 잘못된 결론으로 나아가기도 했지만*, 벤은 자신이 선택한 과학의 언어로만 스스로를 규정했다.


  자기 자신이 정초한 토대 위에서 단단했고, 아름다웠으며, 능력을 마음껏 펼쳤던 벤의 서사는 감동을 준다. 타인의 손가락질 때문에, 사회의 폭력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벤으로부터 용기를 얻기를, 벤처럼 스스로를 긍정하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2013년에 나는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 NAS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나는 아카데미 회원이 된 최초의 트랜스젠더 과학자가 된 것이 자랑스럽다.


나는 트랜스젠더 과학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젊은 성 소수자 과학자들의 롤 모델이 될 수 있어 행복하다.


무려 17년(학부까지 치면 21년)이라는, 저임금과 고된 노동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다시 하라고 해도 난 할 것이다. 모든 순간이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임신 기간 중 처방받은 테스토스테론 유사 약물이 자신의 성 정체성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의심했다. 물론 그는 곧바로 “트랜스젠더 대부분은 태아 때 비정상적인 호르몬에 노출된 일이 없다”는 말을 덧붙이지만, 트랜스젠더 정체성의 '원인'에 관한 자신의 ‘과학적(?)’ 추론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는다. 하지만 ‘테스토스테론이 트랜스 정체성의 원인이다’는 명제는 젠더 정체성의 문제를 호르몬의 차원으로 축소환원하는 편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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