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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Jan 23. 2021

멕시코라는 혐의, 호모라는 낙인

넷플릭스 드라마 〈누군가 죽어야 한다〉2020

  토마스 만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의 주인공은 밝고 선명한 시민의 세계를 동경하는 예술가 남성이다. 그는 스스로를 ‘교황청의 저 거세된 성가대원’에 비유하며 자신의 남성성을 부정한다. 왜 그는 유서 깊은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당당한 시민의 세계에 편입되지 못한 채 유약한 예술을 탐닉하는 걸까? 그의 어머니가 남미 출신이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는 저 아래 남미에서 오셨거든……” 토니오 크뢰거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거세된 남성성이 남미 출신 어머니 때문이라고 믿는다. 반듯한 유럽의 남자들에게, 남미는 불순한 혐의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누군가 죽어야 한다〉의 주인공 가비노도 마찬가지다. 독재자 프랑코가 스페인을 통치하던 시절, 가비노의 어머니는 혼란을 피해 아들을 자신의 고향인 멕시코로 보낸다. 가비노는 이모들의 양육으로 멕시코에서 10년을 보낸다.


  10년 후, 다시 스페인에 돌아온 가비노는 라사로라는 무용수 친구를 데려온다. 동성애자, 공산주의자, 반동분자를 잡아넣고 고문하는 일을 하는 가비노의 아버지 팔콘은 남자가 무용을 하는 것도, 그런 남자를 아들이 친구로 데려온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비노와 라사로의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의심은 점차 커져가고, 인간성을 모욕하는 악랄한 시험들이 반복된다. 사실, 그들이 맞았다. 가비노는 호모고, 라사로를 사랑한다. 하지만 라사로는 아니다. 그는 가비노를 사랑하지만 그 감정은 친구를 향한 것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가비노의 멕시코 생활이 그를 호모로 만들었다고, 멕시코에서 온 무용수 남자는 당연히 호모일 거라고 믿는다. 이렇게, 멕시코는 거세된 남성성, 즉 호모라는 낙인을 정당화하는 혐의가 된다. 여기에 가비노 가문이 감춰온 진실이 더해져 드라마는 극으로 치닫고, 끝내 파국을 맞는다.


  어떤 잘못된 믿음은 때때로 진실이 된다. 사람들이 호모의 존재가 불법이라고 믿으면, 호모는 불법이 된다. 사람들이 더러운 호모의 기질이 멕시코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믿으면, 멕시코는 더러워진다. 내내 윤리적인 건 멕시코 출신인 라사로와 가비노의 어머니 미아 뿐이지만 그들은 모든 죄의 근원으로만 환원된다. 이 윤리와 현실의 괴리가 〈누군가 죽어야 한다〉를 드라마로 만든다. 가슴 아프지만 현실적인 아이러니다.


  〈누군가 죽어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이 어떻게 진실이 되는지, 진실이 얼마나 우스운 방식으로 확립되는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우연적인 진실이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지를 보여준다. 〈누군가 죽어야 한다〉를 프랑코 시대의 과거 이야기로 웃어넘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잘못된 진실로 죽고 있다. 가비노의 이름으로, 라사로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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