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천문〉(2019)
세종은 독자적인 시간을 꿈꿨다. 조선은 명나라의 절기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조선에 맞지 않아 농민들이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관노였던 장영실의 재능을 알아본 세종은 그에게 조선의 시간을 만드는 일을 맡겼다. 하지만 독자적인 시간은 '반역'이었다. 시간은 세상의 주인, 즉 명나라 황제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사대주의에 물든 조선의 관료도 조선의 시간을 탐탁지 않아한다. 세종과 장영실의 꿈은 위기를 맞는다. 영화 〈천문〉은 이 과정의 이야기를 좇는다.
하지만 영화의 진짜 주제는 독자적인 시간이 아닌 세종과 장영실의 사랑이다. 성애적 장면만 없을 뿐이다.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배려하는 모습, 함께 꿈을 좇다가도 다른 데 관심 팔린 상대에게 질투를 느끼는 모습에서 사랑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남자들의 웅장한 꿈'이라는 서사에 '남자들의 로맨스'를 더한 것이 아니라 '남자들의 로맨스' 서사에 '남자들의 웅장한 꿈'을 덧붙인 느낌이었다. 지금의 주류 대중문화에서 '남자들의 웅장한 꿈'이라는 안전장치 없는 '남자들의 로맨스' 서사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는 '남자들의 웅장한 꿈' 따위 없이도 빛나는 '남자들의 로맨스' 서사가 등장하길 기대해본다.
덧. 세종이 꿈꾼 조선의 시간은 명나라 중심의 세계관에 균열을 내지만, 조선의 시간을 표준화하기도 한다. 즉 세종의 시간은 조선 내부의 시간'들'을 삭제하고, 다양한 삶의 리듬을 통제하며 규율하는 규범적 시간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따라서 세종과 장영실이 꿈꾼 조선의 시간에 감동한 사람들은 반드시 규범적 시간에 포섭되지 않는 개별 삶이 지니는 시간성에도 감동해야 하며, 그들을 표준화하려는 시도를 의심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