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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Oct 24. 2020

게이의 위기는 로맨스의 위기?

드라마 <이어즈&이어즈>(2019)

음울하다고 거부하기엔, 너무도 가까운 미래를 그린 SF 드라마


  드라마의 배경은 가까운 미래다. 몇십 년 후, 몇백 년 후가 아니다. 브렉시트, 트럼프의 '재선', 시진핑, 푸틴, 프랑스의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을 떠올리게 하는 주인공 등에서 드라마가 그리는 시대가 우리의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주인공들이 사용하는 과학기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우리보다 조금 더 앞선, 익숙한 기기를 사용한다.


  여기서 드라마의 현실감이 생긴다. 먼 미래를 배경으로 마음껏 상상력을 펼칠 때, 시청자는 드라마와 거리감을 두기 수월하다. 실제 현실과 드라마 속 현실 사이의 갭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다르다. 당장 몇 년 후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시청자는 각자의 미래 전망과 드라마의 전개를 끊임없이 비교할 수밖에 없다. 정말 트럼프가 재선할까? 미국과 중국이 핵전쟁을 벌일까? 르펜은 결국 성공할까? 우리 모두가 저렇게 비참해질까? 등등의 질문을 드라마와 주고받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는 극우 정치인이 총리가 되는 과정과 한 대가족이 무너지는 과정을 교차시킨다. 큰돈을 맡긴 은행이 망해버린 후 할머니의 집에 얹혀살게 된 중산층 부부, 육체의 제약을 넘어 기계·정보와 하나 되는 트랜스휴먼을 꿈꾸는 소녀, 정치 활동가, 홀로 아이를 키우는 장애여성, 공무원 게이, 꼬장꼬장한 할머니 등등.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한다. 때로는 개별적으로 때로는 집단적으로. 


  드라마의 분위기는 대체로 음울하다.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지만 혜택을 입는 사람은 소수다. 혜택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생활은 기술 이전으로 퇴보한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심화되지만 그 위기를 사는 사람들은 하층민뿐이다. 있는 자들은 계속 승승장구한다. 극우주의자의 득세로 국제 정세는 파탄 나고 전쟁 공포는 심화된다. 불안정한 국제정세로 난민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난민의 처지는 점점 위태로워진다. 생명을 포함한 모든 인간적 가치가 무너지며 존엄한 삶에 관한 사회적 합의는 파기된다. 


  문제는 이 모든 상황이 민주적 선택의 결과라는 데 있다. 지도자들은 합법적으로 위임받은 권력을 휘둘렀을 뿐이다. 사람들은 극우 정치인에게 쏟은 기대와 신뢰가 자기 자신에게 칼이 되어 돌아온다는 걸 뒤늦게 깨닫지만 상황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심지어 드라마가 희망을 발견하는 지점조차 암울하다. 드라마는 말한다. 결국 저항은 우리가 삶의 극단까지 몰렸을 때에야 시작될 것이라고. 그때까지 우리들은 스스로의 힘을 위선자와 불평등한 권력구조에 자발적으로 갖다 바칠 것이라고.


  1시간짜리 드라마 6편에 담긴 극 사실주의적 미래 풍경 앞에서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나 복잡함 때문에 거부하기엔 너무나 가까운 미래다. 우리의 미래는 드라마와 얼마나 같고, 다를까?



게이의 위기는 로맨스의 위기


  주인공들이 위기를 겪어내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미래사회'의 위기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분투한다. 하지만 게이 캐릭터인 대니가 겪는 위기는 그 내용이 조금 다르다. 그는 결혼까지 한 백인 게이지만, 이내 자신이 관리하던 난민 캠프에서 만난 남자와 '위험한 사랑'에 빠진다. 대니의 위기는 로맨스·친밀성의 위기다. 이는 딱히 새로울 것 없는, 게이들이 오랫동안 겪어온 위기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미래사회에서도, 게이들은 여전히 로맨스라는 오래된 위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동성 결혼이 가능해진 시대지만, 게이들은 여전히 로맨스·친밀성의 위기에 '머물러' 있다. 과거부터 그래 왔고, 현재에도 그러하지만, 게이들은 미래에도 로맨스·친밀성의 문제로 존재 의미를 고민한다. 게이를 재현하는 고루한 방식은 문제적이지만, 드라마는 게이들이 영원히 로맨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제도적 보장과는 별개의 문제다. 게이·퀴어 친밀성의 내용이 '주변부'의 '결함 있는' 친밀성으로 여겨지고, 규범적 친밀성의 대립쌍으로 이해되는 한, '게이의 위기=로맨스의 위기'라는 도식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동성결혼이 법제화로 '정숙하고 낭만적인 사랑'이 시민됨의 기준이 되더라도, '난잡한' 성생활을 이어가는 게이들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밝은 곳'에서 웃는 게이들 뒤에서 스스로를 혐오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내재화된 수치심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로맨스를 갈구하지만, 바로 그 수치심으로 인해 끝내 실패할 것이다. 결국 앞으로 나아가려면, 이 수치심을 끌어안아야만 한다. 떨쳐낼 수 없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인 이 수치심을 부정하는 한, 게이이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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