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드 가드>(2020)
이 따위 세상 불 타 없어지든가.
수백 년간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선善을 위해 싸워 온 불멸의 용병들. 그들은 불사의 몸으로 옳다고 믿는 걸 위해 싸워왔다. 하지만 세상은 나빠지기만 하고 그들은 점점 지쳐간다. 고작 대여섯 명으로 수백 년을 버텨왔기에 외롭기도 하다. 불멸자 조직의 리더 앤디를 연기한 샤를리즈 테론은 불멸하는 존재의 쓸쓸함을 완벽히 표현해냈다.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시절부터 마녀사냥의 시대를 거쳐, 세계대전까지 참전한 앤디는 고단한 삶의 무게와 권태 사이의 위태로운 긴장을 온몸으로 체화한 캐릭터다.
영화의 스토리는 평범하다. 불멸의 몸을 탐낸 제약회사 일당이 앤디의 동료를 납치하자 앤디가 그들을 구하러 가는 이야기다. 이 과정의 액션과 긴장감도 괜찮은 편이지만 역시 포인트는 불멸자의 삶과 감정이다.
앤디의 동료인 니키와 조의 사연이 강렬하다. 십자군 전쟁 때 서로를 적대하는 십자군과 아랍군으로 만난 조와 니키의 러브스토리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들을 납치한 제약회사 용병들이 '너희들은 게이고 애인 사이냐'라고 조롱하자 니키와 조가 반박한다.
이 사람은 내 남친이 아냐. 너는 상상도 못 할 의미가 있는 사람이야. 어둠에 길 잃은 내게 달이었고 추위에 떨 때 온기였어. 천 년이 흘러도 입맞춤에 전율이 퍼져. 이 세상에 베풀기엔 아까운 다정함이 넘치는 사람이고, 논리나 잣대로 가늠하지 못할 내 사람이지 남친이 아니야. 내 전부이자 그 이상이지.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오글거리는 과잉이었을 이 대사는 두 캐릭터가 남자라는 이유로, 이들이 십자군 전쟁 때부터 사랑해왔다는 이유로 특별함을 획득한다. 이번에도 게이 재현은 틀에 박혔지만(문란하거나 낭만적이거나) 영화는 이들의 낭만을 극한으로 밀어붙임으로써 게이 재현 클리셰의 의미를 고민케 한다.
아마도 이성애 커플이었다면 사용할 수 없었을 이 대사는 게이의 문화적 재현의 순수한 극단을 보여준다. 낭만이 사라진 시대, 게이들은 낭만의 다음 담지자로 부상하고 있다. 낭만적인 이성애 커플이라는 재현은 '현실성'을 잃었다. 이성애 관계가 자리한 구조적인 폭력이 널리 가시화되어 개인의 노력으로는 그 간극을 매울 수 없음이 너무도 명백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낭만을 버릴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불확실한 시대의 확실성으로 낭만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낭만의 다음 주자로 게이 커플이 소환된다. 아직 낭만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게이 커플을 통해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이러한 재현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획득할 수도 있다는 이점도 있다).
하지만 게이 관계의 낭만성만 강조하는 재현은 이들의 '문란한' 실존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문란'과 '낭만' 사이의 간극에서 게이의 해소할 수 없는 본질적인 외로움이 생겨난다는 데 동의한다면, 낭만의 다음 타자로 재현되는 게이 이미지를 유심히 관찰하고 비판할 필요가 있다. 낭만을 갈구하지만 문란하며, 문란한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문란을 멈출 수는 없는 존재들의 삶을 훼손하지 않고, 더욱 두텁게 재현해내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