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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Sep 03. 2023

아흔에 시인이 된 엄마

당신은 '시인'입니다

 

"세상에! 완전 시네."


나는 엄마를  시인이라 부르기로 했다. 나이 아흔에 이런 직함을 갖게 되다니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시인'이라 이름 박힌 명찰을 정식으로 제작하여 가슴에 달아드리고 싶다.


눈을 뜨자마자 엄마는 스마트폰에 담긴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회환 섞인 넋두리로 아침을 열었다.  아버지에 대한 좋았던 감정과 때로는 미웠던 감정을 날실과 씨실로 촘촘하게 엮어낸다. 60년이 넘도록 함께 살면서 어찌 좋았던 일만 있었으랴. 괴로웠던 일도 많았을 테지만 굳이 나눌 필요가 있으랴. 모든 게 우리네 인생에서 한데 어우러진 생활의 한 조각이 아니던가. 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이리도 애절하게 가슴에 사무칠 줄 우리는 미처 몰랐다. 떠나고 난 뒤에야 두 분의 사랑이 지극했다는 걸 알면서 후회했다. 마음 편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자식으로서 더 많은 관심을 쏟아드리지 않았던 게 아쉬울 뿐이다.


엄마의 넋두리에 인생이 담겨 있다. 아버지로 인해 가슴 밑바닥부터 올라오는 연민과 허망함이 조화롭게 섞여 있다. 어쩌면 이리도 구수한 넋두리가 있는지. 깨알 같이 박힌 명심보감 한 권이 통째로 머리에 담겨 있어서 가능한 걸까. 명심보감의 수많은 명언을 적재적소에서 자연스럽게 꺼내는 습관이 운율을 만들어내는 걸까. 어딘가에 파묻어 둔  공부에 대한 열정이 수십 년 곰삭아 분출되는 건지도 모른다. 굳이 드러내 자랑하지 않고 깊숙이 눌러둔 지식의 산물이라 할 수도 있겠다.


엄마의 넋두리는 그저 혼잣말로 내뱉는 순간적인 행위이다. 원고지를 앞에 두고 고뇌의 표정을 지으며 머리털을 쥐어뜯어야 나오는 게 아니라서 종이도 연필도 필요 없다. 읽고 또 읽으면서 문장을 매끄럽게 고쳐야 탄생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읽고 쓰고를 반복하면서 수정이나 가감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글과는 의미가 완전 다르다. 엄마의 시는 손으로 썼다가 지우고 또 고쳐 쓰는 글이 아닌 즉석에서 뽑아내는 마음의 언어이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흘려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어휘들이었다. 어떤 때는 눈물방울 떨굴 정로로 구슬프게 들리고, 어쩔 때는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답게 들리기도 했다. 누에고치가 실을 뽑아내듯 술술 나오는 넋두리를 듣고 있자면 놀라움에 입이 떡 벌어지고 만다. 밖으로 또로록 굴러 나오는 어휘에 몸을 실어 나도 모르게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짧은 음절에 묵직한 내용을 품은 시는 단순함을 넘어 의미심장한 철학을 담았다. 이런 넋두리가 시가 아니고 무엇이랴.


'아, 엄마는 문학적 소질이 잠재되어 있었구나.'

나는 엄마의 모든 넋두리를  '시'라는 신분으로 격상시켜 드릴 예정이다. 내 역할은 마음껏 시를 빚어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한껏 돋우는 일이다. 


엄마랑 함께할 때마다 옆에 바짝 붙어 턱을 괴고 앉아 있다. 언제쯤 시가 나올지 '시' 받을 준비를 단단히 하기 위해서다. 시도 때도 없이 철철 쳐흐르기에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엄마의 입을 응시해야 한다. 세상에 단 한 번 나오는 시가 공중분해되거나 영원히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정신을 모아야 한다. 애간장을 다 녹여 나오는 걸쭉한 그것들을 단 한 음절도 훼손하지 않고 몽땅 기록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품어 입으로 뽑아내는 그 귀한 시들을 지금부터 차곡차곡 모으려 한다. 세상에서 가장 진실되고 맑은 영혼이 담긴 시집을 엮어 보기 위함이다.  자신의 시집을 가슴에 안고, 수줍게 웃는 시인 엄마를 빨리 배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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