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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Feb 18. 2024

거짓말 같은 세상살이

(엄마의 시 4)

거짓말 같은 세상살이


산 것도 아니요

죽은 것도 아니고

벌레도 아니요

홀로 된 짐승처럼

가족과 떨어져

뭐 하려고 예서 웅크렸나


전부 속고만 살았지

거짓말 같은 세상살이

잘 산 줄 알았는데

막판에 이리 고생할 줄이야

모든 게 꿈만 같이

한탄스럽게 지나가는구나.




엄마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언제나처럼 하늘색 이불부터 들춰보았다. 근육이 몽땅 빠져나가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아버지의 긴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당장이라도 아버지를 앞세워 집으로 모셔겠다는 듯 땀이 나도록 열심다.


언제부턴가 엄마의 눈에 비친 것은 아버지의 회생이 아니라 비참한 최후였다. 벽처럼 두꺼운 병원 문은 결코 아버지를 내보내지 않겠다는 듯 꽁꽁 가두었다. 그 사실을 냉철한 눈으로 판단하기 시작한 엄마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내쉬었다.  


아버지 면회를 다녀오면서 엄마는 입으로 슬픔을 승화시켰다. 운율이 딱딱 맞는 노래가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아버지가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모습에 대해 숨김 없이 적나라한 감정을 표출해냈다. 엄마의 눈에 아버지는 사람 노릇하지 못 하는 사람으로 비치면서 비관적이 되었다. 집에도 못 오는 사람이 과연 벌레인가 짐승인가. 왜 병원에서 웅크리고 있느냐며 답답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엄마는 착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면 반드시 그 대가가 있다고 믿는 분이다. 남한테 해를 끼치지 않고 그저 무던하게 살아온 아버지가 인생 말년에 왜 이런 고생을 하는지 믿어지지 않을 테다. 착하게 사는 사람은 그 끝이 있다는 명심보감 말씀을 철석같이 믿었건만 속고 살아온 게 아닐까 넋두리하고 있다. 집이 아닌 병원에서 왜 웅크리고 누워만 있는 건지 거짓말 같은 삶을 애통해하며 인생이 모두 거짓말 같다고 역설한다.

 

엊그제 뉴스에서 92세 된 부부가 손을 맞잡고 안락사 했다는 사연을 접했다. 그 기사는 며칠간 메스콤을 타며 연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안락사가 합법화된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현재 고령사회인 우리나라에서도 여기저기서 안락사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다. 치료 가망성이 전혀 없는 상태로 그저 숨만 쉬고 있는 환자들, 사는 것 자체가 지긋지긋한 고통인 환자들 얘기이지만 현실감 있는 주장이다. 당장 내년인 2025년부터는 인구 중 65세 이상의 비율이 25프로를 넘어서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관절 건강이 썩 좋지 않은 내가 병석에 눕게 된다면 어찌 될지,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특히 허리 안 좋은 사람한테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있으라 하면 사는 게 고통이요, 지옥일 테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나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할 문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는 편안하게 눈을 감게 해주는 정책을 절실하게 원할 수도 있겠다. 굳이 먼 훗날 일을 들먹일 필요 없이 가까운 지인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인지력도 떨어지고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90 노인을 수년 간 간호하던 딸이 병석에 눕게 되었다. 누구를 탓하고 무엇을 원망해야 할까.  


아버지는 현명한 분이셨다. 70대에 이미 엄마와 함께 '연명치료 거부 의향서'를 작성하여 종합병원에 제출해 놓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환자 주민등록번호만 치면 모든 기록이 다 나올 텐데도 의사는 가족한테 물었다.


"기관지 삽관을 해야 합니다. 동의하시나요?"

"기관지 삽관이란 목에 구멍을 뚫어 연명치료하는 게 아닌가요?"

"맞습니다수술을 안 하면 당장 숨을 거둘 수도 있습니다."


의사의 말을 듣고 '절대로 연명 치료는 하지 않겠다'라고 거부할 자식들이 몇이나 될까. 더군다나 가족들 모두가 '절대로 연명 치료를 하지 않겠다'라 이구동성으로 말을 맞춰야만 효력이 발생한다. 가족들 중 한 명이라도 '무슨 소리야, 죽어가는 아버지를 그냥 보고만 있을 거야?'라고 제동을 건다면 연명치료 거부의향서 애초의 목적은 상실되고 만다.


나는 안락사에 대한 확고한 의견은 아직 없으나 가족들의 판단은 냉정해야겠다고 말할 수는 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마음이 모질지 못하니 앞날이 어찌 될는지 모르겠다. 소심한 성격대로 대의를 따르겠다면서 소극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가끔 아버지가 목구멍을 뚫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비록 수명은 조금 더 짧아졌겠지만 인간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은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잡숫고 싶은 것 마음껏 잡수시고, 말하고 싶은 것 자유롭게 표현하셨을 텐데. 또 다른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비록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은 상실되었지만 좀 더 가까이에서 아버지와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잖아. 최선을 다 해 우리는 아버지를 돌봤고, 그 과정에서 형제간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잖아.


어찌 됐든 간에 우리는 더 이상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누구 하나 소홀함 없이 최선으로 아버지를 돌봤다는 것에 위안을 삼기 때문이다. 엄마가 인생 최고의 덕목으로 치는 '우애'도 아버지 덕분에 더욱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만족감이 있다. 후회가 많기에 엄마를 더욱 소중하게 모셔야겠다는 다짐도 덤으로 받지 않았더냐.


어쩌면 자식들의 결속을 위해 아버지가 희생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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