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불능자 옆에 있어준 고마운 친구들
최근 친한 작가들 사이에서 본인이 갈등상황에서 회피형인지 정면돌파형인지에 대한 자가진단과 집단 고백이 있었다. 회피형인 작가들은 팀회의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더라도 자기로 인해 갈등이 생기는 게 싫어서 그냥 가만히 있는 단다. 반대로 정면돌파를 선호하는 작가들은 자기로 인해 PD, 혹은 동료작가들과 며칠간 대립하더라도 할 말은 한단다.
그들이 서로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한바탕 소란을 지켜보다가 문득 우리 팀의 갈등상황을 돌이켜보았다. 내가 모두가 조금씩 언짢아 보이는데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분위기를 잘 견디지 못한다. 그럴 때면 차라리 노골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여러분은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생각이 다른 것 같은데 내가 맞게 인지한 거냐고, 여러분의 다시 한 번 의견을 피력해주실 수 있겠냐고 말이다. 나는 회피형이 좀처럼 이해 못하는 정면돌파형의 극단에 있는 유형의 사람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회피형을 이해한다. 일을 떠나 친구관계에 한해서라면 나 역시 엄청난 회피형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악질적인 회피형이다. 나는 친구와 갈등이 생길 기미라도 조금 보이기만 하면, 동굴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리거나 먼저 관계를 끊고 도망치는 못된 습관이 있다. 어떤 기억 때문에 이런 못된 습관을 갖게 되었는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데 전혀 고치질 못한 채로 30대를 맞이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17년 전의 일인데도 언제든지 되감기할 수 있는 영화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는 학기 초부터 8명이서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무리에 소속되어 있었다. 마침 2박3일 수련회를 앞둔 때라 처음으로 다함께 시내로 나가 옷과 가방을 서로 골라주고, 함께 먹을 간식거리도 사면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이제 남은 일은 잔뜩 설레하며 수련회로 출발하는 날 아침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대망의 수련회 당일 날, 나는 친구들이 골라준 고른 옷을 입고, 함께 맞춰 산 가방을 들고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어찌된 일인지 약속된 시각이 다 되도록 같은 무리의 친구들은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친구들을 기다리다가 담임선생님의 호령에 하는 수 없이 먼저 대형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내 친구들은 이미 버스에 타 있었다. ‘야, 니네 뭐야~’라며 다가가려는 찰나 눈에 들어온 광경이 나를 그대로 굳게 만들었다. 나와 짝꿍으로 같이 앉기로 약속했던 친구가 다른 친구와 나란히 앉아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는 게 아닌가. 나머지 다른 친구들은 나를 보자마자 표정이 굳거나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내 자리는 없었다.
태어나서 느껴보는 가장 복잡한 감정이었다. 이전에 경험해본 적 없는 상실감과 슬픔이었다. 이 친구관계가 끝났구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평소 데면데면하게만 지내오던 학급친구와 나란히 앉아 수련회에 갔다. 2박3일간의 인생 첫 합법적 외박을 앞둔 중학생들의 설렘으로 터져나갈 듯이 시끌벅적한 대형버스 안에서 나는 혼자 창문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던 기억이 난다.
2박3일 수련회는 지옥 같았다. ‘4명이서 짝을 지으세요!’ 라는 조교의 말에 우물쭈물하다보면 ‘학생은 짝 없어요?’라는 질문을 받기 일쑤였다. 내가 평소 누구와 친했는지 전부 알고 있을 반 친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외톨이가 되었음이 선언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움츠러들어 고개를 숙이고, 친했던 친구들은 내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은 채로 보란 듯이 더욱 소란스럽게 떠들기 시작하고, 유독 착했던 학급 친구들이 나를 끌어당겨 자기들의 깍두기로 받아들여준다. 착하디 착했던 학급 친구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나를 보는 눈에는 호기심이 서려있었다. 그렇게 친하게 지냈으면서 심지어 지금 옷과 가방도 그들과 같은 디자인으로 입고 있으면서 왜 너는 여기 혼자 떨어져 나와 있느냐고 묻고 싶어 보였다. 외톨이가 된 내게 손내밀어준 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그들의 호기심을 최대한 해소해주고 싶었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도 내가 한순간에 외톨이가 된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기억은 나에게 꽤나 큰 트라우마로 남아 ‘누구든 나를 불시에 어떤 이유로든 떠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일례로 나는 중학교 2학년 이후부터는 등굣길에 교실에 들어서서 친구들에게 먼저 아침인사를 건넨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없다. 친구가 먼저 인사를 해오면 그제야 아주 반갑게 리액션은 하지만, 먼저 인사를 하진 않았다. 고등학교 때 친구 한 명이 의아해하며 물어본 적도 있다.
“너는 왜 아침엔 먼저 인사를 안 해?”
“내가? 내가 그랬나? 미안해! 근데 우리 사이에 그런 게 뭐가 중요해~”
모르는 척 반문하며 눙쳤지만, 솔직한 대답이 아니었다. 실은 매일 아침 교실 문을 열어 재끼기 전마다 두근거렸다. 어느 날이라도 내가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했다가 그들이 한껏 소란을 부리며 나를 못 본 척 지나가버리고 나는 또 혼자가 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아침마다 친구들이 내게 먼저 인사해주기를 조마조마해하며 기다린 것이다. 먼저 인사를 해준다는 건 혼자가 될 그 날이 적어도 오늘은 아니라는 뜻이니 안심할 수 있었다. 매일을 그러고 살았다. 중학교 2학년 이후 몇 년간을 말이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중학교 2학년 당시 내가 왜 혼자가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 말씀을 듣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였을 뿐 익숙한 번호였다. 잊을래야 잊히지 않는 번호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수련회 가는 버스에서 나란히 짝꿍으로 앉기로 했던 단짝의 번호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전화를 무시하라고 권했지만, 나는 미처 다 태워내지 못하고 남아있는 애정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었다. 조심스레 문자를 보냈다.
‘종례 중이라 전화 못 받았어. 무슨 일이야?’
곧바로 답장이 왔다.
‘아직 OO독서실 다니지? 내가 그 앞으로 갈게. 잠깐 얘기 좀 하자.’
나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독서실 앞으로 갔다. 그 애의 뒷모습이 보이자마자 반가움과 공포가 뒤섞여 가슴이 또 쿵쿵거렸다.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몇 마디의 의미 없는 안부인사가 오간 뒤, 친구는 중학교 2학년 때 내가 왜 혼자가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냐며, 궁금하다면 이야기해주겠다고 물어왔다. 언젠간 이야기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자기도 마음이 불편했다면서 말이다. 나는 그러라는 뜻으로 가만히 있었고 친구는 이야길 시작했다.
그간의 시간동안 난 내가 무심하여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범했을 잘못으로 친구들이 떠나갔을 거라고 믿어왔다. 정확하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물을 기회는 놓쳐버렸지만, 분명 내가 뭔가를 크게 잘못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친구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는 내 몫의 잘못이 없었다.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따지고 보면 니 잘못은 아니었지.”
5년에 걸친 자숙의 기간의 끝에 죄목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내 죄가 아니었다면, 내 지난 자숙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걸까? 내게 남은 것이라곤 모든 관계가 하루 아침에 일방적으로 단절될 수도 있다는 공포 뿐이었다. 나는 그 날 친구와의 불편한 조우 이후 내 트라우마가 사라질 줄 알았다. 원인이 사라졌으니 트라우마도 사라지는게 마땅하다 여겼는데, 몇 년간 몸에 밴 트라우마는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가령 이런 식이다. 본인의 의도와 마음과는 다르게 친구가 나로부터 서운함을 느꼈다면, 응당 전후상황에 대해 해명하고 진심을 전달하려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노력을 일절 하지 않았다. 노력이 수고로워서가 아니었다. 그런 수고는 백번이고 천번이고 할 수 있다. 다만 친구가 서운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 자체로 이미 관계의 종말이 선언된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관계에 발생하는 미세한 균열조차 내겐 공포였다. 충분히 보수하고 이어붙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이것이 관계에서 일종의 겸양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건 오만과 독선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한 친구가 내게 가르쳐주었다. 매일같이 언제든 친구들이 나를 떠나갈 거라 생각하며 산다는 속내를 들키고 난 뒤, 그녀는 내게 이렇게 반문했다.
“넌 나를 너무 과소평가 하고 있어.”
나는 내 속내의 어떤 부분이 그녀를 과소하게 평가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내가 그렇게 쉽게 너에게 실망하고, 이 관계를 손쉽게 포기해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도대체 나를 얼마나 하찮은 인간으로 보면 그래?”
내가 포기하면 이 관계가 그대로 종말로 직행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는 자신의 의지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설명이었다. 나의 한계나 결함을 고스란히 내보였다가는 친구들이 나를 떠나가고 말 것이라는 생각 역시도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 있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한 상상이었다. 그녀는 한껏 화가 난 표정으로 자신이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재차 강조했고, 나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잘못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다가, 또 하다가, 행여나 한 번 잘못을 하게 되더라도 나를 쉽게 떠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진 친구가 있구나-하는 안도감이었다.
나는 사람 관계엔 힘이 없다고 믿고 살아온 셈이다. 하루아침에 누구든 나를 떠날 수 있으니 버림받는 것에 무뎌지자고 다짐해왔다. 관계는 그 모든 것들을 넘어설만큼의 힘이 없다고 말이다. 10대와 20대 동안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떤 관계 위에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잘 존재하고자 애써왔다. 그리하여 서른 즈음에는 혼자서도 잘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 비로소 독립할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서른이 넘은 지금 정작 내게 남은 건 지난 관계에 대한 후회 뿐이다. 내가 조금만 손을 뻗었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는데도 용기내지 못하고 떠나보낸 친구들이 자꾸만 생각났다. 그 후회가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변해 나를 엄습했고, 더 나아가 스스로를 관계불능자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껏 사랑하는 친구들과 부대끼고 살아갈 수 있는 건, 이런 나라도 끝내 손을 놓지 않아준 친구들 덕분이다.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하지 않아도 매일 아침 나에게 인사를 해주던 친구들, 자그마한 갈등만으로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해 동굴 속에 숨으려는 나를 끝내 끌어내 붙잡아준 친구들, 무뚝뚝하고 차가운 내게 끊임없이 변함없는 애정과 사랑을 표현해준 친구들. 지금 내게 남은 과제는 이 사람들을 놓지 않는 것이다. 우리 관계에는 생동하는 힘이 있고, 그 힘은 나로 하여금 어려운 시기를 건너게 해주었고, 내가 언젠가 완벽하게 자립한다면 그것 또한 그들 덕분이라는 걸 언제까지라도 기억하는 것이다.
빅 리틀 라이프 3회 <이제는 연락이 닿지 않는 너에게> 에서 출연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 친구들이 준 것들 덕분에 자신들이 지금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거라고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조금씩 누군가에게 빚진 채로 어른이 되어가는데, 그들에게 받은 애정을 고스란히 돌려줄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빅 리틀 라이프 3회 <이제는 연락이 닿지 않는 너에게>는 내가 빚져놓고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친구들을 향한 사과이자, 이런 관계불능자 옆에 지금껏 버티고 있어준 친구들에 대한 감사인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