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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도수 May 04. 2023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이라는 환상에 대하여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이라는 환상에 대하여


  내가 이십대를 다 바쳐 사랑했던 한 가수는 “애써 지켜야 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지”(윤상, 사랑이란, 2000)라고 노래했다. 비슷한 류로는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박원, 노력, 2016)라는 노랫말도 있다. 그들의 촉촉한 낭만에 굳이 정색하고 입장을 밝혀보자면, 그들의 노래를 사랑하긴 하지만 노랫말의 주장에는 반대한다. 사랑일수록 애를 써서라도 지켜야 하고, 노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발생부터 지속하는 것까지를 일컫는다는 전제하에, 세상에 ‘자연스러운 사랑’이라는 건 없다. 발생이 자연스러웠대도 유지하는 데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흔히들 하늘의 인연이라고 하는 부모-자식 간의 사랑에도 엄밀하게 따져보면 숱한 노력이 동반한다. 사랑의 관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부모-자식이라는 전제 하에, 우선 부모의 입장이 되어보면 이렇다. 어린 아이의 생떼를 어르고 달래고, 사춘기 아이의 이유 없는 반항을 받아주고, 반찬 투정을 듣더라도 매일 삼시세끼 식사를 차리고, 돼지우리 같은 방을 대신 청소해주고, 평일 내내 회사일로 녹초가 되었대도 휴일이면 아이와 나들이를 떠나고, 계절마다 춥지도 덥지도 말라며 새 옷을 사준다. 부모들이 이 모든 것을 해내는 과정에 노력은 하나도 들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들의 즐거움만을 위해 절로 몸이 움직였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식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재롱을 떨고, 성인이 되어서는 바쁜 와중에도 부모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챙기고, 주말엔 식사라도 한 번 같이하려고 친구들과의 약속을 조율하고, 통장잔고가 어떻든 때맞춰 용돈이나 선물을 드리고, 떨어져 사는 대신 주기적으로 전화를 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잔소리를 듣고도 화내지 않고 한 귀로 흘려야 하며, 심지어는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때조차 부모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는다. 이것들에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아직 부모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자식으로는 살아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다. 나의 평화를 위해서든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든, 부모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니 부모-자식 간의 사랑에서도 어느 정도 환상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 다른 종류의 사랑과 별 다를 바 없이 어느 정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저 살아가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서로 이 정도의 노력을 주고받기 때문에 그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다 여겨지는 것일 뿐이다. 이 말이 너무 시니컬하게 들린다면 이런 식으로 바꿔 말할 수도 있다. 피로 맺어진 부모자식 간의 사랑에도 그 정도 노력이 필요한데 하물며 생판 남인 사람과의 사랑과 관계유지에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냐고.


  그 중에서도 가장 절실한 노력은 바로 이해받고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노력하지 않고도 우리가 영혼의 쌍둥이처럼 상대방의 많은 것들이 순순히 이해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우리가 사는 곳은 그런 동화 속이 아니다. 지리멸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서로 이해받고 이해하기 위해서 종종 악도 지르고 눈물을 쏟아가며 노력할 수밖에 없다.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버리면 사랑이 끝나버리고 말 거란 두려움 앞에서, 이해란 아무리 저만치 손을 뻗어도 쉽게 닿을 순 없는 막연한 가치였다. 나는 우습게도 이해라는 것이 무엇인지 사랑을 하면서가 아니라 ‘빅 리틀 라이프’를 제작하면서 깨달았다.


  ‘빅 리틀 라이프’를 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오락가락하는 인터뷰이의 말을 다듬는 초벌 편집과정이었다. 아무래도 전문 인터뷰이가 아닌 이들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자기 이야기를 쭉 늘어놓다보니 종종 정반대의 감정이나 심리상태가 동시에 튀어나와 뒤엉켰다. 마주앉아 마이크를 쥐고 듣던 나 역시 인터뷰 당시에는 달리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넘어갔는데, 편집기에 앉아서 세세하게 편집하다보면 ‘어? 이 말은 아까 했던 말이랑 반대되는 말 아니야?’ 싶은 순간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 순간이 정말 많았다. 


  그럴 때마다 고독한 일인제작자는 마땅히 상의할 사람도 없이 고뇌에 빠지곤 했다. 이 상반되는 증언들 중 일관성 있는 한 가지만을 채택하고 나머지 이야기는 죄다 삭제해버리고 싶은 유혹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중구난방의 이야기들을 아주 매끈하게 다듬어서 누가 들어도 한 번에 이해되도록, 청취자들이 혼란스러운 메시지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그래서 결국 뭐라는 거야?’라는 의구심이 들지 않도록, 그냥 손쉽게 이 이야기를 선형적으로 다뤄버리자는 유혹 말이다. 오락가락하는 인터뷰를 남겨뒀다가는 청취자들이 ‘이야기가 왜 이랬다 저랬다 해?’라며 정지버튼을 눌러 버릴까봐 걱정이 됐다. 


  제작자로서 욕심도 있었다. 손으로 살짝만 쓸어내려도 미끄러지듯이 손끝에 걸리는 것 하나 없는, 아주 매끄럽고 빤질빤질한 결과물을 만들어보고도 싶었다. 모든 증언들이 짜 맞춘 것처럼 한 가지 메시지만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있는 그런 인터뷰물 말이다. 그런 인터뷰물이라면 뚜렷한 주제의식 하에 모든 청취자가 제작자의 기획의도대로 이해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뭐 딱히 대단한 결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중구난방의 이야기를 한 방향으로 열 맞춰 세우기 위해서는 녹음파일을 수차례 반복해서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반복해서 듣다보니 되레 그 상반되는 증언들이 전부 다 진짜라는 걸 깨달아버린 탓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 모든 증언들이 다 절절하게 진짜라서 그 어느 맥락도 함부로 삭제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어떡하겠나, 진짜를 왜곡할 수는 없으니, 그들의 증언이 오락가락하는 모든 과정을 고스란히 담을 수밖에. 


  그래서 엄마를 너무 증오한다고 말했다가도, 이내 여전히 엄마한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버겁다고 말하는 목소리를 그대로 담았다.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하고 여전히 숨기고 싶다고 울먹이며 고백했으면서, 또 몇 분 뒤에는 이게 자신이 부끄러울 일은 아니지 않느냐며 열을 올리는 목소리를 그대로 두었다. 집을 사는 건 투기라고 핏대 올리며 규탄하다가, 또 몇 분 뒤에는 자신도 결국 부동산시장에 굴복해 집을 사고 말았고 지금은 집값이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다는 목소리를 그대로 두었다. 상반된 메시지여도 그 속에 거짓은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가 할 일은 그 진실들을 전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거였다. 


  ‘빅 리틀 라이프’를 제작하며 가장 감사했던 평가는 이 이야기들이 전부 자기들 이야기 같다는 말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청취자들이 ‘빅 리틀 라이프’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 같다고 여겨준 건 그 상반되는 감정들과 생각들을 전부 살려둔 덕분인 것 같다. 전지적인 편집자 시점에선 오돌토돌해서 거슬리는 부분들을 구태여 잘라내지 않은 덕분에 오히려 생동감을 얻은 셈이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자기 삶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전지적일 수 없으니까. 내가 주인공인 인생에서 나는 언제나 1인칭 화자일 뿐이고, 어쩔 수 없이 이 바람에는 이렇게 흔들리고 저 바람에는 저렇게 흔들리며 살아간다. 제작자인 내가 전지적 편집자 시점에서 사포질해서 다듬고 싶었던 것들, 그러니까 입에서 꺼끌거리는 맛, 은근하게 거슬리는 모순들, 오락가락하는 생각, 묘하게 불편한 감각 같은 것들, 어쩌면 그것들이 우리 살아가는 민낯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다. 그러니까 내가 편집기 앞에 앉아 그들의 말에서 빈틈과 모순을 발견한 때가 그들을 한 꺼풀 벗겨낸 뒤 진짜 살아있는 모습을 처음 제대로 발견한 순간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 이야기를 자의로 취사선택해 어떠한 프레임 안에 가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자각한 때에야 비로소 그들을 이해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모든 진실을 이해하려고 그들의 목소릴 밤새도록 돌려 듣다가 어쩐 일인지 나는 그들을 더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불완전함과 미숙함 때문이었다. 그 전이라면 일관성이 없다고 답답하게만 여겨왔던 그 빈틈과 모순들, 그것들까지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결국 그들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과거의 언행과 달라지는 모습을 발견한다는 건 언제나 불신의 근거가 되었고, 사랑의 종결을 선언하게 되는 이유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참혹한 결과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애써 들이는 노력이 곧 사랑을 발명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생소한 경험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그간 함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뱉었던 말들이 얼마나 얄팍했는지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이해할 수 있어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애써 노력하겠다는 엄중한 선언과 같은 의미로 쓰여야만 했다. ‘빅 리틀 라이프’를 제작하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바이다. 이제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점들 까지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쉬이 그치지 않을 참이다.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애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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