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낱말 도깨비를 아는가?”
낱말, 도깨비. 전혀 관련 없는 두 단어의 조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당신에게 이는 너무나 불친절한 질문이다. 나는 이 불친절함이 불유쾌가 되지 않도록 먼저 나의 옛 추억 하나를 이르집어 소개하고자 한다.
한창 인도네시아에서 유학할 때의 일이다. 후배였던 K와 함께 오랜만에 한국에서 가져온 김치로 찌개를 끓이는데, 국자라는 말이 도저히 생각이 안 났다.
“그 국 푸는 거.. 그 뭐냐.. 큰 수저..? 국숟가락(?) 좀 갖다 줘”
몇달 한국어를 드문드문하게 썼다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 어눌한 모양새에 K도 나도 그만 저항 없이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K가 내 이마를 짚으며, “여기 머릿속에 낱말 집어먹는 도깨비 같은 게 있나 봐“ 하는 농담을 한 것이 생각난다. 낱말 도깨비가 내 머릿속의 국자를 잠깐 훔쳐갔던 것일까. 국자를 훔쳐간 일이 미안하긴 했는지, 그 시기 도깨비는 내게 많은 낱말을 가져다줬다. 같은 것을 다른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하는 수많은 낱말 말이다. 그때 후배이자 애인이었던 K가 내 일상에 가져온 고민은 ‘사랑한다는 말을 어떻게 다르게 표현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사랑을 표현하기에 사랑한다는 말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이를 자주 쓰기가 겁났다. 혹여 내가 그에게 하는 ‘사랑한다‘는 말이 쓰고 써서 닳아버리면 나중엔 이 마음을 어찌 전해야 하나 걱정되어, 수많은 다른 표현을 골똘히 생각해 그에게 건네곤 했던 것이다.
’너는 아침에 보아도 저녁에 그리운 사람이야‘
’널 못 본 며칠은 시틋해서 도저히 사는 재미가 안 나더라‘
이런 낯뜨거운 고백들을 매일같이 면대 면으로 한 것을 사랑의 위대함이라 불러야 할지 20대의 광기라고 해야 할지, 지금 생각하면 조금 쑥스러운 면이 있으나 그래도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기억이다. 그때 사랑이란 말을 내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살펴보며 고민해보고, 언어를 연필 삼아 수백 장 소묘를 남기고 나서야 사랑이란 낡은 낱말로 표현하는 그 감정이 실은 같은 게 아니라 수백 수천 개로 다르게 표현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또한, 나아가서는 세상이란 곳이 이 거창한 사랑조차 그 장대함의 한 부분을 이룰 뿐인, 수천수만 가지로 표현해도 설명하기 부족한 넓고 다채로운 곳임을 그리 깨달을 수 있었다. 확장된 내 언어의 넓이만큼 나의 사고도 확장된 셈이다. 세월이 흘러 K는 비록 옛사랑의 그림자가 되었으나, 낱말 도깨비가 가져온 선물은 여전히 나의 일부분이 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당신은 이제 낱말 도깨비를 안다. 당신은 그를 만난 적이 있는가? 누군가는 그를 이미 만났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는 근래 특히나 자주 그를 만난다. 나는 편집자를 꿈꿨으나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주관과 정성의 세계에서 살고 싶었던 원래의 꿈과는 달리, 금융이라는 객관과 정량의 세계에 유배된 삶을 살아가는 요즘, 이 고된 적응의 과정에서 나의 정신에 유독 위로가 되어준 것은 글쓰기였다.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을 나만의 언어를 사용해 새롭게 그려낸다. 이 일은 닳고 무뎌진 삶의 감각을 도로 날카롭게 벼려낸다. 그 날카로움은 사고의 지평을 다듬고, 일상에 새로운 무늬를 입히는 원동력이다. 다만, 예술을 하는 이에게 작업에 맞는 다양한 도구가 필요하듯, 이 일을 잘 해내기 위해서도 다양한 도구가 필요한 법인데, 글쓰기에서 쓰임새 많은 도구 중 하나는 어휘였다. 세상을 나만의 언어로 다시 품어내기 위해선 가진 낱말이 많을수록 유리한 법이다. 그래서 아직은 글쓰기가 손에 익지 않은 나로서는 ‘꼭 들어맞는 표현이 있을 텐데-’ 하고 머릿속을 간질이며 낱말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이 글 쓰는 일의 거의 절반이었다. 그럴 때면 기억에서, 타인에게서, 그리고 많은 경우 책에서, 낱말 도깨비의 흔적을 찾아 그를 애타게 부르곤 한다. 그러다 마침내 그가 요철이 딱 맞는 낱말을 내게 가져오면 마음속 전구가 반짝 켜진다. 말하자면 그와 함께한 어휘 찾기는 많은 고민과 보람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일이라고 하겠는데, 이는 한편으로 참 즐거운 일이라 혼자만 누리기엔 다소 낯없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K가 나의 일상에 낱말 도깨비를 불러왔고 지금도 내가 종종 타인의 글을 통해 그를 만나듯, 혹시 나도 누군가를 위해 낱말 도깨비를 불러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된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이 기획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이 글들은 나의 일상에 대해 써낸 일종의 명상록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낱말 도깨비를 부르는 초대장이다. 자주 쓰는 것 같은데 정확한 뜻을 생각해보면 아리송한 낱말을 새삼스레 다시 살펴보기도 하고, 생소하지만 분명히 자기 쓰임새가 있는 낱말들을 새로 찾아보기도 하며 글을 써낸다. 이는 친숙한 언어가 주는 편안함을 다소 포기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들여다보고 표현해보는, 일종의 비효율적인 비틀기이기도 하다. 비록 나의 소소한 이야기는 기억 속에서 한순간 물비늘처럼 사라질지라도, 낱말만은 읽는 당신의 가슴에 남길 바란다. 그리 알게 된 낱말 낱말이 편협의 장막을 찢어내고 당신의 일상과 사고에 아로새길 새로운 무늬를 기대하며 낱말 도깨비를 불러본다.
[+] 도깨비 주머니
- 이르집다 : 오래전의 일을 들추어내다.
- 골똘하다 : 한 가지 일에 온 정신을 쏟아 딴생각이 없다.
- 시틋하다 : 마음이 내키지 아니하여 시들하다.
- 정량 : 일정하게 정하여진 분량.
- 정성 : 물질의 성분이나 성질을 밝히어 정함.
- 요철 : 오목함과 볼록함.
- 낯없다 : 미안하고 부끄러워 대할 면목이 없다.
- 새삼스레 : 이전의 느낌이나 감정이 다시금 새롭게.
- 물비늘 : 잔잔한 물결이 햇살 따위에 비치는 모양을 이르는 말.
- 아로새기다 : 무늬나 글자 따위를 또렷하고 정교하게 파서 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