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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 Kyron Oct 07. 2021

오르지 못하는 계단

요정의 삶을 빌려

 밤이 되고 달빛이 창가로 들어오면 가브리엘 집의 계단 밑에 즐비한 요정 기숙사에선 기상 종이 울린다. 빨간 모자 요정은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종이 울리자마자 90도로 일어났다. 천장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없는 것을 보면 역시나 오늘도 빨간 모자가 1등으로 일어난 것 같다. 그때 기숙사 문 밑 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분이 온 것이다.


 “요정들 모두 일어나세요. 오늘도 새로운 달이 떴습니다. 부지런히 움직이셔야 오늘 목표치에 도달하실 수 있어요.”


 요정들 중 가장 오랜 기간 가브리엘 집에서 살아온 요정 사감이다. 엄마 같은 포근함과 아빠 같은 포스를 모두 겸비한 요정계의 자웅동체로 명망이 높다. 요정 사감의 등장에 천장과 바닥에선 우당탕탕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기숙사 복도 여기저기선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일출까지 6시간 밖에 안 남았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여름이라 밤이 짧습니다.”

 요정 사감의 재촉에 요정들이 부스스한 얼굴을 한 채로 각자의 방에서 설렁설렁 걸어나왔다.


 “오늘도 올라야 할 계단이 많습니다. 오늘도 열심히 올라서 빨리 각자의 특성을 찾읍시다.”


 요정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뉘었다. 각자의 특성이 있는 요정과 특성을 찾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요정으로 말이다. 각자의 특성을 찾기 위해서 무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무한의 계단을 완등한 요정에게는 그 요정에게 알맞은 특성이 부여된다. 마치 요정 사감이 외모적 특징으로 불리는 빨간 모자 요정과 달리 하나의 직책으로 불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무한의 계단은 계단에 끝이 없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특성을 받은 요정들조차도 계단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속설로 속성을 받는 즉시 계단 정상에서의 기억은 사라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계단의 끝은 미지의 세계였다. 하지만 우리는 끝을 알 수 없음에도 계단을 오른다. 이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요정들의 궁극의 목적은 뭐죠?”


 “당연히 무한의 계단을 오르는 것입니다.”


 요정들은 태어나서 19살이 되기까지 무한의 계단에 오르기 위한 준비를 한다. 체격이 좋은 요정은 몸을 단련하고, 머리가 좋은 요정은 전략 공부에 몰두한다. 사교성이 좋은 요정은 팀을 이루어 계단을 같이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요정들도 있기 마련이다. 체격이 좋은 것도 아니고, 지능이 특출난 것도 아니고, 사교성이 엄청 좋은 것도 아닌 그런 요정말이다.


 빨간 모자 요정이 바로 그런 요정이다. 안타깝게도 체격, 지능, 사교성 어느 것도 특출난 것이 없어 모든 일에서 어중간하게 우물쭈물거리는 그런 대부분의 요정이다. 그럼에도 빨간 모자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고 오늘도 자신을 알리는 빨간 모자를 쓰고 기숙사를 나선다. 그가 가진 유일한 장점은 끈기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빨간 모자 요정은 오르고자 하는 집념과 굳은 끈기를 챙긴 채 계단으로 향한다. 가브리엘 방에 있는 일본 소년 만화를 보면 아무것도 없지만 끈기와 집념을 가진 주인공이 결국엔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다는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역시 만화는 만화인지 빨간 모자도 수년 간 꾸준히 올라갔지만 여전히 위보단 아래가 더 가깝다.


 “빨간 모자야, 너는 이런 무의미한 노력이 지겹지 않아?”


 옆에서 같이 오르던 파란 넥타이 요정이 계단에 기대 앉으며 물었다. 파란 넥타이도 빨간 모자와 같이 그저 그런 요정 중 하나였다. 그는 계속되는 똑같은 일상과 노력에 지쳤는지 계단 오르기를 포기할 심산인 거 같았다.


 “지겹지, 지치고. 근데 난 이제 요정 학교를 다니던 학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성을 부여 받은 요정도 아니야. 그래서 난 계단을 오르지 않는 일상은 상상하기 힘들어.”


 “넌 그럼 평생 계단만 오르면서 살아도 괜찮아?”


 “내가 뭘 원하고, 뭘 잘하는지 모른다면 어쩌면 그냥 계단을 오르는 일이 매일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일지도 몰라. 난 오히려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일상이 더 무섭거든.”


 파란 넥타이는 빨간 모자의 대답에 일부분만 수긍하는 건지 애매한 각도로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나도 내가 맞는지 네가 맞는지 잘 모르겠어.”


 빨간 모자는 파란 넥타이의 대답을 듣지 않고 그대로 다음 계단을 향해 나아갔다. 파란 넥타이는 그런 빨간 모자를 보며 확실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단에 기대어 앉은 채 무릎 사이로 고개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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