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눕 Nov 16. 2023

일상이 미안함인 여자. 그리고 그 옆의 남자

금요일 아침 9시, 지하철에 올랐다.  회사에 쌓인 업무 대신 아빠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창가 너머로 대형병원 건물이 보인다.  시선이 병원 건물에 머물자마자 잊고 지냈던 친구가 불현듯 떠오른다.  올봄 친구의 친정엄마가 큰 수술을 하시고 입원해 계실 때 잠시 병문안을 다녀왔던 곳이다.  가끔씩 소식은 전하고 지냈는데, 최근에는 또 좀 뜸했다.  


‘항암은 잘하고 계시나?  맞다 그러고 보니 친구 딸이 올해 수능 볼 텐데..’ 


집에서 친정엄마 병간호 하며 고3 수험생 엄마 노릇하기가 얼마나 힘겨울지 당최 가늠할 수도 없지만, 그런 친구에게 너무나 무심했던 것 같아 미안함이 몰려온다.


4년 동안 아빠를 치료해 주시던 주치의가 최근 돌아가셨다.  얼마 전부터 의사선생님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는 아빠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매달 한 번씩 병원에 방문하시는 아빠는 어느 날 새로운 의사를 만났다는 소식과 함께 이전 주치의의 부고 소식을 담담히 전하셨다.

처음 아빠에게 암 선고를 하신 분도, 4년 동안 유지가 잘 되고 있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매달 전해 주시던 분도 이 의사분 이셨다.  


"이번 달에도 수치 좋네요.  잘 유지되고 있어요. 다음 달에 봅시다."


고작 1-2분 수치 확인이 전부인 영혼 없는 진료에도 매번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진료실을 나서던 아빠에게 주치의의 부고 소식은 어떤 의미였을까? 지난 4년여간의 여정을 함께 해 온 파트너를 상실한 느낌이셨을까?

  

완치가 불가능하여 호르몬 주사와 약에 의지하며 매달 조마조마 가슴 조리는 삶을 이어오던 아빠에게 그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삶에 대한 회의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한 동안 마음이 많이 허하셨을텐데 아빠의 마음을 미쳐 헤어리지 못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도 제대로 못 드렸던 무심한 딸이라 또 미안함이 몰려온다.


다음 목적지는 남편이다.  남편은 최근 이직을 하였다.  새로 일을 시작하기 전 일주일 정도 모처럼 쉬는 시간을 가졌는데, 하필 그 기간 사무실에 중요한 업무가 있어서 휴가를 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바쁜 와이프 때문에  어디 변변한 곳으로 가족여행조차 다녀오지 못하고 남편은 꿀 같은 휴가를 그냥저냥 보내버렸다.


출근 첫날 새로운 사무실로 이전 직장 동료분들이 화분이며 꽃바구니를 잔뜩 보내 주시며 남편의 새 출발을 축하해 주셨다.  '우리 남편 참 멋진 사람이구나'라고 느낄 겨를도 없이 정작 와이프가 퇴사날도. 출근날도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게 또 미안해졌다.


아끼는 친구도 사랑하는 가족도, 바쁘다는 핑계로  챙기지 못한 내 일상은 미안함 그 자체였다.  일상이 수십여 개의 갈래로 나뉘어 있다면, 그중 70 프로 이상은 미안함이라는 감정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한 시간여, 갖은 미안함으로 마음이 울적하던 찰나, 병원에 도착해 아빠를 만났다.


감사하게도 이번달에도 수치에 크게 이상이 없었고 지난번 새 의사분의 권유로 촬영한 뼈사진도 전이된 곳 없이 다 좋다고 하셨다.


바람은 매서워 코끝은 세하지만 햇살은 따뜻한 가을날이었다.  나는 모처럼 아빠의 팔짱을 끼고  여유로운 가을 산책을 즐겼다.  마지막 남은 단풍잎들은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고, 진료 결과 덕에 더없이 가볍고 기분 좋은 발걸음이었다.


아빠는 김서방이 매일매일 전화를 해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번에 진료 후 내려가는 ktx표가 매진이었는데 김서방이 표를 구해서 보내줬다며 웃으셨다.  


'ktx표가 없었구나. 지난번 어머님 수술 이후로 아프신 장인어른도 한동안 같이 챙기는 거 같더니... 그게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구나..'


내가 미처 챙기지 못하는 부분까지 그는 내 대신 살뜰히 챙기고 있었다.  아빠에 대한 나의 미안함이 그의 수고로 뒤덮이고 있었다.   마치 옛날옛적 스노우 브라더스 게임을 하던 우리처럼 말이다. (혹시, 저만 아는 건 아니죠?)


둘이서 플레이를 할 때면, 남편은 어김없이 본인 근처의 괴물들을 모두 다 처리하고 내 앞의 괴물들을 순식간에 둥글둥글한 눈덩어리로 만들어 시원하게 날려버리곤 했다.  


일상이 온통 미안함 투성인 그녀 옆의 남자는, 반쯤 뒤덮인 그녀의 스노우볼 위에 그의 눈을 힘껏 쌓아 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미안함을 완벽히 뒤덮은 다음에는 힘차게 그녀의 눈덩어리를 처리하고 다음 스테이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그동안 꽁꽁 숨겨뒀던 필명이 제 실수로 남편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이 글은 혹시나 보게 될지도 모르는 남편을 위해 쓴 글이 맞습니다.


 "저기요! 혹시 몰래 와서 읽었다면 그저 못 본 척해주시고 당신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내 마음은 잘 간직해 줘요. 우리 계속 사...........

...............................................










이 좋게 지내요~"


Photo by Pixabay & YouTube Channel GamesPlay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