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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영 Feb 05. 2020

사랑에 개연성을 바라다니

소설은 인생을 모방하지만 인생엔 개연성이 없는걸

  나의 고등학생 시절 우정은 의무와 순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은 공간에 모인 여리고 날선 서른 명의 열여덟은 서로 붙어있길 간절히 원했지만 자꾸 서로에게 상처를 냈다. 고등학교 이학년 중순에 만난 그 애는 그래서 좀 특이했다. 성정이 활발하나 잘 나서진 않았고, 하루 종일 자느라 깨우지 않으면 점심도 안 먹으러 갈 정도로 게을렀지만 밤새도록 그림을 그렸던 애였다. 그리고 사람을 너무 좋아했다. 걔는 그게 자기의 제일 큰 단점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남을 찌르는 눈빛과 행동을 하지 않는 건 좋은 거라고 다독였다. 누구에게 좋은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대상은 필시 나를 포함한 타인임이 분명하다.


  약속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항상 같이 있었다. 다른 친구의 경우와는 달리 생각이 우선한 행동이 아니어서 신기했다. 주말이 되면 걔의 집에 가 몇 시간이고 낮잠을 잤다. 삶을 서로에게 의탁한 수준이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도 대화했는데, 대학을 가지 않을 거라던 걔가 넌 대학 가면 좋겠다, 하는 목소리에 처음으로 고등학교 생활에 미세한 애착을 느끼기도 했다. 나의 열아홉 생일날 말도 없이 홀로 우리 집을 찾아온 그 애한테서 초가 붙여진 만 구천 원짜리 고구마 케이크를 받아들었을 때 고맙다는 말보다 먼저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다른 애들한테도 이렇게 해? 그것은 내 마음의 여집합이 던지는 물음이었다.


  강형철 감독의 영화 <써니>는 파란만장한 고등학교 시절 함께였던 일곱 명의 단짝 친구들이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기까지의 여정과 추억을 담은 영화다. 친구들 중 한 명인 춘화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을 나미가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변하지 않은 서로를 확인한 그들은 유쾌한 조우를 한다. 그러나 이 푸른 기억으로부터 탈락한 인물이 있다. 본드를 한다는 이유로 춘화와 사이가 어긋난 상미다. 본드를 하기 전엔 둘도 없이 친했던 관계였지만 춘화는 본드를 끊지 못하는 상미를 매몰차게 밀어낸다. 그리고 그 자리를 전학생 나미로 채운다.


  상미는 보란 듯이 나미를 괴롭히고 때린다. 둘의 사이엔 그 어떤 앙금도 없지만 상미는 집요하다. 악에 받친 그 모습이 춘화에게 화풀이를 하는 듯 서글프다. 친구를 잃은 패배감이 상미를 그렇게 만들었다기엔 그녀의 태도는 다소 비약적이며 감정과 행위 사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조금 더 꼼꼼히 들여다보면, 마치 절절한 연인을 빼앗긴 것과 같은 분노와 우울이 춘화와 나미를 바라보는 상미의 눈빛에 어린 것을 알게 된다. 단순한 상실감을 넘어 특정 인물을 향한 질투가 폭력으로 드러났다.


  질투는 어디서 기인할까. 유일성을 침해당하거나, 침범하고 싶을 때 끓어오르는 이 정서는 우리를 뜻 모를 방향으로 이끈다. 왜 이렇게까지 깊이 잠기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을 때, 그럼에도 잠수를 재촉하는 날것의 속삭임은 의식할 수 없는 감정의 여집합에 짓눌려있는 목소리 같다.


내가 십 대의 마지막에 만났던 성이 같은 그 애를 사랑한다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관계에 스킨십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정의된 사랑의 필요조건이 에로티시즘이라면 사랑 역시 학습의 영역에 깔린 가공된 감정이다. 그 밑에 깔린 납작한 사랑은 제멋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어 전조를 눈치 채기 힘들다. <써니>의 상미처럼 날카롭게 경계를 찢어내기도, 오래 방치되어 힘을 잃은 탓에 은근한 둔통처럼 밀려오기도 한다.


  변성한 감독의 영화 <불한당>의 마지막 씬에서 경찰 스파이였던 현수는 본래 목표였던 조직의 수장인 재호를 목 졸라 죽이며 차가운 눈물을 흘린다. 자신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진범을 직접 처리하는 결정적 복수의 순간임에도 현수는 서두르지 않는다. 자신의 밑에서 죽어가는 재호를 관망하며, 툭툭 뛰던 맥박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걸 맞닿은 살갗으로 느끼며, 그럼에도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지만 분명히 운다. 그리고 재호의 차로 돌아가 재호가 앉아있던 운전석에 누워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 모습이 마치 세상 밖으로 내쫓긴 것 같은 이유는, 사실 이것만이 전부라 믿었던 주류 감정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비주류의 감정 한복판에 서 있는 본인에게 다가온 추방당한 사랑을 맞닥뜨려서가 아닐까.


  어떤 소설엔 개연성이 필요 없다. 정의되지 않은 사랑이 행위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경계는 사회가 결정짓기에 우리는 그에 따라 무수한 감정을 외면하고 분리한다. 그러나 연인을 껴안고 가장 소중한 친구에 대해 말한다거나, 친한 사람과 마주앉아 사랑하는 이를 말하는 세상에서 사랑과 우정은 자주 뒤엉키고 혼재한다. 무의식에서나마 흐릿해진 금을 넘나드는 상미의 폭력과, 현수의 눈물과, 나의 물음은 복잡한 미로에 갇힌 것처럼 돌파구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 춘화가 나미가 나란히 침대에 누워 과거를 반추하며, 현수가 새벽녘 재호가 앉아있던 시트에 몸을 뉘이며, 지금의 내가 문득 베이커리 쇼케이스에 놓인 고구마 케이크에 찌릿한 기시감을 느끼며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위에서 보아야 출구를 알 수 있는 미로처럼 멀리서 관조하지 않으면 목격할 수 없는 좌표에 놓인 감정들이었음을. 거대한 의식과 학습에 짓눌린 목소리는, 그럼에도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 때론 하나의 추억으로, 인생의 내리막길로, 개연성 없는 선택과 결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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