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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원 Nov 18. 2024

4. 강박적 메모 습관

1부. 9급 1호봉

4. 강박적 메모 습관     


    교육청, 교육지원청 혹은 타 기관에서 보내온 공문은 성격에 따라 행정실이나 교무실에서 접수한다. 접수된 공문은 각 실의 담당자에게 배부되고, 그걸 내용에 맞게 ‘처리’하면 되는데…. 근데 처리를 어떻게 하더라? 


    ‘어제 분명 알려주셨는데….’     


    해당 공문이 내 것이 맞는지 확인 후에, 우선 ‘문서처리’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문은 계속 시스템상에서 붕 떠 있게 된다. 그리고 나는 분명 어제 행정실 공문 담당자(이하 주무관)님께 공문 처리하는 법을 배웠었다. 문제는 ‘배웠던 기억’만 있다는 거다. 벌써 두 번째였다. 발령받고 계장님께 에듀파인(국가관리회계시스템)에 대해 전반적으로 배웠을 때 한 번, 그리고 어제 또 한 번. 처음엔 입력해야 하는 정보량이 워낙 많았고,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정보였으니 백번 관대해져서 잊을 만했다고 치자. 근데 바로 어제 알려준 걸 까먹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도대체 어떻게 된 머리길래 이럴까. 자책을 조금 하다가, 주무관님 눈치를 슬쩍 봤다. 다행히 바빠 보이시진 않았다.      


    “주무관님…. 공문 처리하는 거요. 어제 알려주셨을 때는 분명 문서처리 버튼이 있었는데…. 왜 안 보일까요?”

    “문서진행 탭 말고, 결재대기 탭에서 공문 열면 보일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드디어 알았다는 듯 상쾌하게 대답했지만….      


    ‘결재대기 탭은 또 어디 있는 거지.’     


    계속 여쭤보는 게 죄송해서 마우스만 괜히 깔짝댔다. 결국 보다 못한 주무관님이 도와주셔서 간신히 공문 하나를 해결했다.      



 

    아무리 행정실에서 컴퓨터를 붙잡고 씨름하는 게 주된 업무라도, 다른 직원들과 잡담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때마다 내가 거리 복(福)은 없어도 인복은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행정실에 계신 분 모두가 친절하고 다정하셨다. 그래서 더 경계했어야 했는데…. 그땐 난 역시 운이 좋다며 마냥 좋아만 했었다. 

    습관이 참 무서웠다. 어떤 걸 어떻게 찾아봐야 하는지 몰라서, 마감 기한 내 제출해야 하니까, 직접 찾아보기보다 주변에 물어가며 일하는 방식에 금세 익숙해졌다. 아무리 사소한 걸 물어도, 물었던 걸 또 물어도,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자상하게 알려주시기도 했고, 솔직히 해답을 손쉽게 얻을 수 있어서 편했다. 정확한 지침을 찾아본다는 생각은 점점 희미해지고, 당장 이 일을 해치운다는 생각이 태도가 됐다.      

    그 어느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거 저번에 알려줬잖아요.”     


    순간 머리가 띵했다. 맞아, 저번에 알려주셨는데 난 왜 또 묻고 있지. 마치 지금껏 느꼈어야 했던 자책감이 지금이라는 듯 한꺼번에 쏟아졌다. 신입이라 모른다는 핑계로, 다른 중요한 업무가 있다는 핑계로 얼마나 안일하게 일을 하고 있었나. 학교에서 근무한다고 학생이라도 된 줄 알았던가. 1인분도 못 하는 삶을 살고 있었구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쩌면 자기 효능감이 박살 난 이유가 공무원 인사 시스템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런 내 태도를 무의식은 알고 있었을 테니까. 최소한 어딘가에 적어놓기라고 했다면….  


    그래, 이제부터라도 적어야겠다.     


    궁금한 걸 척척 찾아내거나, 하날 알려주면 열을 아는 사람은 아니니, 이제부터는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적어야겠다. 그때부터 내 매뉴얼이라는 폴더를 만들어서 별별 걸 다 적기 시작했다. 급여작업의 순서같이 중요한 것에서부터 지난 문서 확인하는 법이나 [문서공람] 버튼의 위치 같은 사소한 것까지. 구두로 들은 설명은 이면지에 적어두었다가 바로바로 정리했다. 덕분에 한 달 만에 무려 50개가 넘는 나만의 매뉴얼이 생겼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줄어들고, 기한 안에 혼자 해결하는 일들이 늘어나면서 효능감이 조금씩 올라왔다. 채 반년도 되지 않아서, 다른 분들이 오히려 내게 업무 내용을 묻는 지경까지 됐다. 그럴수록 내 안의 인정욕구가 슬금슬금 머리를 들었다. 퇴근 전 내일 할 일들을 적어두지 않으면 불안했고, 행정실에서 오고 간 말들을 적지 않으면 신경이 쓰였으며, 나중에는 직원들과 평범한 대화를 할 때조차 ‘이 이야기를 안 적어뒀다가 나중에 기억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걱정되기도 했다. 메모한 걸 까먹을까 봐, 그걸 캡처해서 저장하고 USB에 옮겨 담았다. 문득 다른 부서와 전화 통화를 하다 농담까지 끄적이는 걸 인지했을 때야 비로소 불안한 나를 달랠 정신이 들었다.  


    겨울 방학 때 석면 공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관리자들은 마침 회계연도 말이니 남은 예산으로 그 참에 보건실 리모델링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보건실 리모델링 소규모 사업은 신청 안 하시는 거죠?”     


    예산 담당도, 계약 담당도 아닌 내가 이리 물으니, 실장님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것도 적어놨어요?”     


    여름이었나, 가을쯤이었나? 교장 선생님과 회의하고 오신 실장님이 지나가는 말로 소규모 사업 이야기를 흘린 적이 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걸 주섬주섬 주워 들어 곱게 메모장에 적어두고, 그러고도 까먹을까 봐 컴퓨터 바탕화면의 스티커메모장에도 적어 놨다. 스티커메모장이 어떠어떠한 연유로 없어질 수도 있으니, 캡처해서 날짜대로 저장도 해놨다.      


    “네! (당연히 적어놨습니다만?)”     

  



    실장님 송별회 때였다.      


    “주무관님 앞에선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요. 흘려 말한 것도 다 적으시는 분이라….”     


    한 분 한 분께 덕담을 해주시던 실장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근데 굉장히 좋은 습관이에요! 덕분에 일도 빨리 배우시고!” 


    마지막 인사로까지 말씀해 주시는 걸 보니, 메모하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셨구나. 내가 어지간히도 적었나 보다 생각하며, 대답했다. 


    “실장님, 계장님 덕분에 빨리 배울 수 있었습니다!”     


    공무원을 하면서 나한테 이런 면이 있구나, 내가 이런 성격이었구나를 새삼 느낄 때가 있다. 나는 무엇보다 자기 효능감이 중요한 사람이고,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면 지나칠 정도로 괴로워했다. 물론 매번 모든 걸 신경 쓰고 적어놔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피곤할 때도 있지만, 내 정신건강을 위해 약간의 피로함은 감수하려고 한다. 상담 선생님이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면서까지 적는 건 늘 경계하라고 했지만…. 


    “주무관님, 저번에 갑근세 원천징수확인서 어디서 출력하는 거였죠?”

    “아, 잠시만요!”     


    어쩌면 지금은 조금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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