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만남 뒤에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여운이...
2017.10.27, 금 오후
트레킹 하는 동안 라즈에게 틈틈이 한국어 몇 문구를 알려줬다.
'천천히 가자, 쉬어 가자, 날씨 좋다.'
나의 포터인 라즈는 작고 어렸지만 생각보다 다부지고 똘똘했으며 자신감 넘치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얼굴색에 묻혀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나이에 걸맞게 부끄럼을 타기도 했다. 나와 10일 이상을 함께한 라즈. 약 2주라는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갈수록 의사소통이 잘 되고 호흡도 잘 맞아갔다. 라즈가 들려주는 흥겨운 음악에 맞춰 같이 몸을 흔들며 걸어갔다. 고도가 낮아질수록 긴장도 풀리고 여유가 생겼다. 서로 농담도 주고받았다. 그러나 녀석 몸에서 약간이 아닌 조금 많이 냄새가 났다. 나는 매일 저녁 물티슈로라도 간단히 세면을 했지만 이 녀석은 아예 씻지를 않았다. 올라갈수록 물이 귀해서 비싼 돈을 내고 사 먹는 생수를 사용해서 씻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는 오늘의 목적지인 남체(Namche) 마을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웬만하면 얼굴 좀 보여줘라 남체야'
점심 식사 후 출발해서 3시간도 더 넘게 걸었을까. 드디어 저 멀리 남체가 보였다. 쿰부 지역 트레킹을 하게 되면 누구나 지나가야 하는 가장 큰 마을이다. 남체를 기준으로 올라갈 때 오른쪽 길로 올라가면 EBC(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칼라파타르로 향할 수 있고 왼쪽 길로 올라가면 고쿄 호수와 고쿄리로 향할 수 있다. 쿰부 지역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은 두 코스 중 한 코스만 다녀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 두 코스를 모두 다녀올 경우 중간에 촐라 패스라는 가파른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나는 남체에서 오른쪽 길로 올라가서 두 코스를 모두 경험하고 추가로 렌조 라 패스까지 넘어 크게 한 바퀴를 돌고 왼쪽 길로 내려왔다. 3,440m에 위치한 남체에 도착하자마자 트레킹 여정 중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코스를 4일 정도 함께한 아저씨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아저씨!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인생도, 트레킹도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허허, 덕분에 중간중간 말동무도 되고 내가 즐거웠지! 몸 조심히 끝까지 마무리 잘 하세."
"감사합니다. 안전하게 트레킹 마무리 잘하세요."
아저씨와 악수를 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각자의 숙소로 향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수도 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녀석들.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도 될 것 같았지만 여전히 만남 이후 찾아오는 헤어짐은 쉽지가 않다. 많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유독 아쉬움이 묻어나는 순간이 있다. 그런 만남이었던 김 씨 아저씨 덕분에 히말라야는 물론 인생에 대해서 많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저씨께서는 한국에서부터 가져오신 한국산 김치와 깻잎, 멸치조림까지 나눠주셨다. 그래서 고산에서 소화불량과 함께 잃어버렸던 입맛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아저씨는 내가 히말라야에서 만난 천사였다. 정말 감사했다. 고쿄 이후부터는 전혀 예상치 못한 코스와 일정이었지만 아저씨 덕분에 최고의 일정을 보낸 것 같다. 또한 죽을 것처럼 힘든 여정이었지만 안 왔으면 이런 곳이 있는지 조차 몰랐을 렌조 라 패스까지 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감사했다.
올라갈 때 들렀던 로지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신기하게 주인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가까운 사이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처음에 내가 묵었던 방보다 한층 위에 있는 더 따뜻한 방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좋았다. 뭔가 친근하고 편안했다. 올라오면서 이틀 그리고 내려가면서 하루를 보내다 보니 이곳이 마치 내 집 같이 느껴졌다. 간단히 짐을 풀고 식당으로 가서 보고 싶었던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다. 아까 내려오면서 잠깐 동안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감사하게도 다들 건강히 잘 지내고 있었다. 대학교 3, 4학년 ROTC 후보생 시절, 군사훈련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살아오면서 가족들과 일주일 이상 연락을 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아마 이런 경우는 이번이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매일같이 가족들이 많이 보고 싶었지만 특히 힘들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역시 가족들이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모처럼 여유 있는 휴식 시간을 보냈다. 해발고도가 낮아질수록 속도 조금씩 편해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저녁 식사를 주문했다. 아직 다 끝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의 성공적인 트레킹을 미리 자축하며 야크 스테이크를 주문했다.(야크는 히말라야 지역이 원산지인 솟과의 하나로 고산 속 물자를 나르기도 하며 식용으로 먹기도 한다.) 가격은 일반적인 메뉴의 두배 이상이었고 약간 질기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고기와 함께 먹는 야채와 감자튀김은 참 맛이 있었다. 얼마 만에 먹는 고기 요리인지. 고기는 역시 이렇게 맛있는 거였다. 돌아보면 약 2주 동안 트레킹을 하며 내가 먹었던 음식은 밥, 야채 카레, 감자, 식빵, 계란 프라이가 전부였다. 그래서 가족 다음으로 고기가 그리웠나 보다.
내일이면 드디어 12박 13일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나의 쿰부 히말라야 트레킹 여정이 막을 내린다. 긴 시간이었지만 생각보다 짧게 느껴졌다. 그리고 평생을 살아가며 절대 잊을 수 없는 나만의 추억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잊을 수 없는 이 시간과 히말라야에서의 깨달음, 수많은 별들과 추위, 다양한 사람들과 음식, 내 집 같이 편안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추위를 피해 잘 수 있었던 숙소까지 모든 게 감사할 뿐이었다. 이제 내일 하루만 더 걸으면 모든 일정이 마무리된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벌써부터 아쉬운 마음과 함께 기분이 묘하고 이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사히 하산할 수 있음에 감사했고 편안했다. 티백에 우려낸 차 한잔을 마시며 차분하게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