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smine Nov 15. 2021

한국은 조용해지고 프랑스는 떠들썩해지는 그날

한국과 프랑스의 대학 입시 풍경


몇 년 전에 파리의 한국 문화원에서 인턴을 했었다. 그때 주로 했던 업무는 프랑스 언론에 실린 한국 기사 찾기였다. 자포니즘에서부터 지금의 망가 등 J-culture까지 오래전부터 유럽이 짝사랑하던 일본, 땅덩이 자체로 위압적인 중국, 그리고 전 세계적 관종인 북한 사이에 낀 한국의 위치상 유럽에서 한국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고, 한국 관련 기사는 가뭄에 콩 나듯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때의 강렬했던 기억 덕분인지 올해 프랑스어권 언론에 실린 한국 기사를 찾는 업무를 다시 하게 되면서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한국에 관한 기사는 절대, 손꼽히는 수준이라고 호언장담을 했었다. 몇 년 사이에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것도 모르고. 그런데 웬걸, (좋든 나쁘든) 한국에 관한 기사가 엄청나게 많이 발행되는 게 아닌가! 개인적으로 이 모든 공은 전적으로 한류 덕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여담이지만 다시 한번 문화의 힘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장황하게 서두를 시작한 이유는, 다음 주에 있을 대학 수학능력시험 때문이다. 프랑스어권 매체도 한국의 유별난 교육열,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대학 입시, a.k.a 수능에 관심이 많다. 여러 프랑스어권 언론에 수능 시험 날에는 출근도 늦게 하고, 심지어 영어 듣기 시간에는 비행기도 뜨지 않는다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굳이 수능과 대학 입시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아도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그 중요성을 십분 공감할 수 있다. 최근 강남의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는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공부하는 고3 학생들을 위해 수능 시험 날까지 인테리어 공사를 금지한다는 공지가 걸렸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보통 찬반 입장이 갈려 극렬하게 싸우는 댓글란에서 보기 드물게 아파트 입장을 이해한다는 의견으로 대동단결 했을 정도니까. 실제로 나도 수능생을 위한 극진한 배려를 직접 경험한 적이 있었다. 수능 보러 가는 길에 엄마가 차로 데려다주면서 급한 마음에 다른 차를 받았는데 수능 보러 간다고 하니까 연락처만 받고 정말 바로 보내줬었다. 어쨌든 수능 날이 되면 온 나라가 수능에 올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별남은 해외에까지도 정평이 나있다.



Le Figaro étudiant에 실린 수능 관련 기사





하지만 이건 비단 한국의 풍경만이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매년 대학 입시철이 되면 프랑스식 대학 수학능력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로 인해 온 나라가 난리가 난다. 물론 전국이 조용해지는 한국과는 달리 프랑스가 떠들썩한 이유는 바로 서술형 주관식인 철학 시험 문제에 어떤 문제가 출제됐는지 궁금하기 때문. 이 철학 문제는 프랑스에서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관심을 가지며 카페나 바에 삼삼오오 모인 프랑스인들은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2019년 출제된 문제로는

시간을 피하는 것이 가능한가

예술작품을 설명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문화적 다양성이 인류 동질성을 방해하는가

의무를 인정하는 것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인가

윤리는 정치의 최선인가



이전 글에서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어릴 때부터 수많은 진짜 예술작품을 보고 자란, '자신의 역사'를 공부하는 프랑스 학생들과 상대해야 하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는데 이 점은 미술과 역사를 공부할 때 한정이었고, 더 넓은 의미의 어려움이라고 한다면 어릴 때부터 자신의 생각을 논리 정연하게 전개하는 게 당연한 학생들과 교수, 그리고 dissertation라고 하는 그 전개법이었다. 나도 나름 논술 덕분에 대학에 붙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20년 넘게 주입된 주입식 교육의 수혜자는 도무지 이 자율 학습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나의 프랑스 생활은 이 프랑스식 사고로 전환하는 과정이나 마찬가지였고, 석사가 끝나고도 그게 뭔지 몰랐지만 한국에서 일을 하며 삶에 적용을 해보니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요컨대, 하나의 답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 나의 생각과 가치관을 표현하고 논리 있게 뒷받침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

(프랑스 어딜 가나 이 철학을 만날 수 있지만 특별히 내가 주목했던 곳은 박물관으로, 이미 존재하는 역사, 언제나 똑같은 소장품을 가지고 매번 다르게 전시하는 큐레이팅을 보고 이 méthodologie에 경외감을 느꼈다. 박물관 전시는 기회가 되면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다.)






첫 번째로 출판된 번역서에 쓴 옮긴이의 말로 오늘의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입니다. 대학교 번역 수업 때 동화책 번역에 꽤나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프랑스에 살면서 그때보다 프랑스 사회와 문화를 더 이해하고 있지만, 여전히 동화책 읽기는 어렵습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답을 찾아가는 데에 익숙해져 버린 사고 때문에 말이지요. 생각하고 내리는 판단 역시 자유롭게 하는 데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에서 ‘잃어버린 고리’를 프랑스의 교육 철학에서 찾았습니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프랑스 동화책 속에는 프랑스만의 ‘철학’하는 힘이 숨어 있습니다. 해마다 입시철이면 프랑스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대입 시험인 바칼로레아 철학 문제가 발표되기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진실을 포기할 수 있는가?”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불의를 경험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는 답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문제가 발표되면 프랑스 사람들은 문제에 따른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과 의견을 나누며 토론하는 모습을 꽤 오랜 시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문화를 거슬러 올라가면 어려서부터 스스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며 생각하는 힘을 길러 주는 프랑스 교육을 만날 수 있습니다. 프랑스 동화책에는 이런 교육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게끔 하는 프랑스의 철학을 말이지요.


이 책은 여러 질문을 던집니다.


시간은 왜 소중할까? 동정심이란 무엇일까? 사랑하는 상대를 잃었을 때 무엇을 느낄까? 다시 회복해 나가는 과정은 어떨까?


정답을 물어보기보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독자에게 묻습니다. 정답만 찾는 데 익숙한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볼지 생각하게 하지요. 이 책을 읽은 아이들의 질문에 어른들이 더 힘들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이 책이 어른들에게는 아이와 함께 보내는 보석 같은 시간이, 아이들에게는 정답만 찾는 환경에서 자유로이 생각하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P.S

그냥 넘어가기 아쉬우니까 졸업식 사진 투척. 앞에 세 분은 교수님으로 기억한다. 저런 amphithéâtre에서 대학 수업을 듣는다. 여기는 우리 학교는 아니었고 Université PSL이라고 여러 학교 묶어서 하나의 큰 기관을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인 ESPCI Paris.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가 다녔던 학교라고 한다. 아무리 봐도 봐도 모르겠는 프랑스 사고, 교육 + 교육 시스템.... 이것도 기회가 되면 나중에 더 자세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