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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Nov 12. 2021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는다

파리 테러 회복의 상징이 된 파리 문장의 역사



파리 테러가 일어난 지 벌써 6년이 지났다. 사실 파리에서 테러가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니지만 우리가 콕 집어 말하는 '파리 테러'는 무려 130명이 사망한 2015년 11월 13일 테러를 가리킨다. 그날 밤에 우리는 집에서 술을 마셨고 남편은 잠이 들었다. 나는 깨있었는데 갑자기 파리에서 테러가 났다는 속보가 뜨기 시작했다. 혼자서 패닉 상태가 되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접하고 걱정할 가족들에게 먼저 연락을 했고, 파리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한 뒤 잠 청했다. 그러나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샤를리 엡도 테러가 일어났을 때도 밖에서 벌벌 떨며 집에 들어왔는데, 파리 테러가 일어난 다음 날에도 무서워서 도저히 집 밖을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침에 나가야 할 일이 있어서 집 밖을 나갔는데 나가자마자 하필 히잡도 아닌 니캅을 입은 두 명의 여자를 마주쳤다.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때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은 기억이 6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한동안은 테러가 일어난 11구 근처는 가지도 못했다.






« Fluctuat nec mergitur ».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는다'라는 뜻의 파리시의 모토이다. 한국에 있을 때 파리에 대한 향수병과 함께 이 라틴어 문구를 미니홈피며 메일에 마치 지금의 카카오톡 프로필처럼 사용했었다. 그렇게 나의 추억이 담긴 이 문구를 파리에서 가장 많이 만나게 된 때가 바로 파리 테러 이후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흔들릴 수는 있어도 가라앉지는 않는다는 이 말은 테러의 상처를 입은 많은 사람들에게 파리의 회복을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다.

(배가 파도에) 흔들릴지언정 (바다 아래로) 가라앉지 않는다는 파리의 모토는 사실 배가 그려진 파리의 문장(紋章) 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 기원을 이해하려면, 센 강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파리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를 가려면 노르망디 해변까지 올라가야 한다. 거의 200km나 떨어진 먼 길이다. 그런데 왜 파도를 항해하는 범선이 파리의 모토와, 문장이 되었을까? 이 상징은 센 강의 상인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 배는 이미 1210년에 프랑스혁명(1789년) 때까지 대상인 가운데서 선출된 '파리 시장'이 관리한 파리 자치제에 기원을 두는 뱃사공 길드 인장에서 모습을 보인다. 길드는 센 강에서의 사업을 관리하고 파리와 다른 도시와의 교류를 발전시켰다. 따라서 현재 파리의 문장에 새겨진 배는 그들의 상징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13세기 길드 인장을 그린 Théodroe Vacquer 그림. Papiers Vacquer, Mns 263-f86, 10 juillet 1869 © BHVP




물론 범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1210년의 인장에는 강에서 운행하는 배의 모습이었고, 제1제정 시기에는 이시스 여신이 뱃머리에 새겨지기도 했다. 1817년에는 항해선으로, 1848년 제2공화국 때는 세탁선(당시 센 강에 많이 있었음)으로 바뀌었다. 1942년이 되어서야 1412년 인장에 나타난 배의 디자인을 다시 취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문장에서 볼 수 있는 배의 모습이다.


파리에서 만나는 이시스 여신과 이집트 건축 ↴ ↴ ↴

https://rapha-archives.tistory.com/104



 제1제정 시기 사용하던 파리 문장. 뱃머리에 이시스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제2공화국 당시 파리 문장





현재 파리의 문장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인 뱅상 오리올(Vincent Auriol)의 1949년 8월 20일 법령에 의해 규정되고 결정되었다. 여기에는 톱니 모양의 왕관이 포함되었는데 이 왕관은 구시가지 성벽을 상기시키고 중앙 권력에 대한 독립을 상징한다. 또한 도토리가 달린 왼쪽의 떡갈나무 가지는 시민의 용맹함을, 오른쪽의 열매가 달린 월계수 가지는 승리를 상징한다. 오랫동안 파리의 전통적인 색깔은 빨강과 파랑이었다. 공식적으로 이 두 색상이 등장한 때는 13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래의 샤를 5세가 되는 황태자와 분쟁이 있었을 때 당시 대상인 선출 파리 시장이었던 에티엔 마르셀(Étienne Marcel)은 자신의 당원들에게 반은 빨강, 반은 파란색인 두건을 쓰게 했던 것이 그 시작이다. 중간에 있는 프랑스 왕가를 상징하는 백합꽃은 이 에티엔 마르셀이 주도한 반란 이후 파리에 대한 왕권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1358년 붙여진 것이다.




현재 파리의 문장






한편 « Fluctuat nec mergitur »라는 모토가 공식적으로 파리의 모토가 된 것은 19세기가 되어서였다. 15세기까지 파리의 인장에는 단순히 강에서 활동하는 파리 상인의 인장이라는 뜻의 « Sigillum mercatorum aquæ Parisius »가 있었을 뿐이다. (위의 첫 번째 사진 참고) 1853년 11월 24일 당시 센 지사였던 오스만 남작의 결정으로 « Fluctuat nec mergitur »는 파리의 공식 모토가 되었다.





시간은 흘러 흘러 2015년이 되었다. 2015년 11월 13일 일어난 테러로 130명이 사망하고 350명이 부상을 당한 후, 파리의 이 문장은 테러리즘에 직면하여 시작된 저항의 외침이 되었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파리 시민과 정치인, 예술가 그리고 이 모토를 아는 전 세계인이 이 문장을 공유했고 « Fluctuat nec mergitur »는 테러리즘에 저항하는 슬로건이 된 것이다.

비극의 현장에도 « Fluctuat nec mergitur »가 그려져 있다. 테러가 일어난 다음 날, 근처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Grim Team라고 불리는 그라피티 예술가 집단은 5시간도 채 되지 않아 이 모토가 담긴 높이 2.5미터, 너비 12미터의 거대한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그들은 며칠 후에 파리 10구의 quai de Valmy에도 두 번째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같은 레퓌블리크 광장, 2015년 2월 이곳에 있던 Monde et Médias라는 카페가 연기에 휩싸였다. 그 후로 몇 개월 후, 카페 Monde et Médias는 « Fluctuat nec mergitur »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파리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삶의 기쁨, 문화에 대한 갈증, 축제에 대한 열망을 위해, 그리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2015년 Grim Team이 그린 프레스코화. Henri Garat / Ville de Paris






« Fluctuat nec mergitur »는 파리가 정기적으로 직면해야 했던 홍수의 위험을 상기시킨다. 홍수의 위험은 센 강과 센 강을 둘러싼 파리라는 도시가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2015년 11월 13일의 테러가 발생한 지 6년이 지났지만 파리 시민들에게 테러의 상처는 아직까지 남아있다. 파리와 센 강이 자주 파도에 잠기긴 하지만, 결코 가라앉은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남겨진 사람들은 여전히 테러의 상처와 두려움과 싸우고 있지만, 결코 테러에 굴복하지 않고 삶을 살아간다.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는다' 파리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P.S 1


테러 이후 인스타에 남겼던 글.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내린다'는 아폴리네르의 시를 패러디해보았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르고, 파리의 삶도 한 걸음씩 흘러가고 있다.' 테러 이후 일상이 회복되는 모습을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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