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학을 다닐 때 적응하기 힘들었던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특별히 의아했던 점은 같이 수업을 들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꼭 가고 싶은 학교를 가야만 했던 집념 때문이었는지 학교를 3곳이나 다녀보았는데, 석사 2학년을 다녔던 학교에서 이 현상은 유독 두드러졌다.
한국보다 빠른 (만) 나이에 학교를 들어가는 데다 학사는 총 3년이라 거기에서 또 1년이 세이브되고 남자들은 군대를 갈 필요가 없으니 유급 없이 학사를 바로 졸업만 하면 만 21, 22세에도 석사를 시작할 수도 있는 곳이 프랑스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몇십 년 일을 하다 다시 공부할 필요성을 느껴서 느지막이 석사에 입학하는 어른들도 많았기 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수업 시간에 앉아 있는 건 사실 그렇게 이상한 풍경은 아니다. 하지만 늦깎이 학생이라고 하기엔 숫자가 너무 많았다. 심지어 내가 들었던 한 수업에서 학생은 나 혼자 뿐이었고 10여 명 되는 나머지 학생들은 전부 할아버지 할머니들. 거기다 나 혼자 동양인 학생이었으니 튀기 싫어하는 나는 수업에 앉아 있는 것 자체로 고역이었다. 물론 수업은 재밌었지만.
어쨌든 그런 낯선 풍경 속에서 하루 이틀 적응을 하다 보니 그분들이 정식 학생이 아니라 청강생(Auditeur libre)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생이 아니라 청강생이라니, 이건 또 이것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 학기 학비를 몇 백만 원씩이나 내고서도 수강 신청이라는 전쟁을 거쳐야 하는 전공생도 전공 강의를 못 듣는 판국에 청강생이라니, 그것도 석사 전공 수업에? 그 무엇보다 폐쇄적인 입학 과정을 거쳐 철옹성 같은 학벌 체제에 둘러싸여 학부생 시절을 보낸 한국 대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였을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국에서처럼 한 학기에 학비를 몇 백만 원씩 내는 것도 아니고 불꽃 튀는 수강신청 전쟁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로 청강생의 존재는 수업에 별 영향은 미치지 않는, 아니, 오히려 나와 교수가 1대 1로 수업을 해야 하는 불상사(?)를 막아준 고마운 존재였다. 아, 발표할 때 관람객이 더 많아진 건 좀 싫었지만. (청강생은 발표를 하지는 않지만 발표자한테 질문은 한다...)
그리고 몇 달, 몇 년을 더 관찰해본 결과, (우리 지도교수) 청강생들은 거의 매년 수업을 등록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교수와 여타 학생(특히 박사과정생)들과도 유대 관계가 좋았다. 지도교수 수업이 끝나는 6월에는 매년 프랑스 상원인 Sénat에서 종강 파티처럼 식사를 했는데 식사를 조직하는 일도 청강생들이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보통 분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청강 제도는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학(Université)에서 시행하고 있었다. 청강생은 당연히 학생 자격이 없기 때문에 등록 또는 출석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없고, 시험도 응시하지 않으며 발표를 하지 않아도 된다. 학생증을 소지하더라도 프랑스 학생이 보장받을 수 있는 각종 혜택(보조금, 대학 기숙사, 사회 보장)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청강 제도는 각종 혜택과는 관계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학교의 청강 제도 홈페이지의 첫 문장을 보면 어렴풋이 알 수가 있는데, 바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교육의 기회.
EPHE는 창립 이래 인문학 및 사회과학 강의를 대중에게 공개했습니다. 학교에서 연구하는 주제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학위 조건에 상관없이 등록할 수 있습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내가 졸업한 이곳은 1868년 이름 그대로 '실용적(Pratique)' 연구 교육 방법을 장려하기 위해 설립된 연구 기관이다. 1864년 프랑스의 언어학자, 철학자, 종교사가이자 비평가인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은 '가장 풍부하고 가장 유연한, 그리고 가장 다양한 지적 운동'을 일으킨 독일 대학과 비교하여 4세기나 5세기의 수사학자보다 현대 과학 교육 수준이 낮은 프랑스 고등 교육을 한탄하는 글을 게재했다. 1863년 6월부터 나폴레옹 3세의 공교육 장관이었던 빅토르 뒤루이(Victor Duruy)는 르낭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여 교육부에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및 독일의 고등 교육 기관에 대한 비교 조사 수행을 위임하였다. 그리고 1868년에 발표된 연구 결과는 처참했다. 연구 수단의 부족, 너무 적은 수의 의자, 노후화된 건물, 보잘것없는 도서관, 충분한 보수를 받지 못하는 연구원 등... 게다가 소르본, ENS, 콜레주 드 프랑스의 유명 교수들은 학생들을 원형 강의실에 한꺼번에 몰아넣고 일방적으로 교수가 강의를 하는 전통적인 대형 강의에 만족하고 있었다. (음 근데 이 단점들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이러한 전통을 깨고, 기존 대학과는 달리 초기 교육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닌 해당 분야에서 이미 심도 있는 교육을 받은 학생과 학자를 받아들이고, 대형 이론 강의 대신 연구실과 세미나에서 하는 교육을 개편한 실습을 통한 연구를 우선시하게 된 곳이 바로 EPHE였다. 따라서 19세기 말 유럽 모델, 특히 독일에서 영감을 받은 프랑스의 독창적인 구조인 EPHE의 창설은 당시 고등 교육 개혁을 위해 투쟁하던 많은 학자들의 투쟁의 결과에 빚을 지고 있다.
이 사례는 약간 결이 다르긴 하지만, 프랑스 최고의 미술이론 분야 교육 기관 중 하나인 에꼴 뒤 루브르(Ecole du Louvre)에도 청강 교육 과정이 있다. 일반 대학보다 좀 더 체계적인 시스템을 자랑하는데 학생들의 수업을 청강하는 것이 아닌, 청강생들을 위한 교육 과정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에꼴 뒤 루브르라 하면 루브르 박물관의 방대한 컬렉션과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수준 높은 큐레이터, 복원가 등의 네트워크 활용이 가능하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인데 청강생 역시 그 혜택을 똑같이 누릴 수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하는 선생님들에게 선사시대부터 현대미술에 이르는 서양 미술사의 큰 흐름을 3-4년에 걸쳐 수업을 받을 수도 있고, 역시 그 선생님들과 함께 방학이나 주말 등을 이용해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 파리의 루브르뿐만 아니라 에꼴 뒤 루브르와 연계된 지역 박물관 및 미술관, 문화예술 기관에서도 수업을 들을 수도 있다. 꼭 파리에 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또한 에꼴 뒤 루브르에 등록한 청강생도 에꼴 뒤 루브르의 학생들처럼 학생증을 받는데 이 카드로 루브르 박물관은 물론 오르세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 외젠 들라크루아 미술관을 무료로 방문할 수 있고, 기메 동양 미술관, 로댕 미술관, 퐁피두는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이 카드를 활용하여 청강생들은 박물관 및 기념물에 가서 직접 작품 앞에서 에꼴 뒤 루브르 출신 학생 또는 큐레이터가 지도하는 소규모 그룹 강의를 들을 수도 있다.
과정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1년짜리 수업의 수강료는 대략 350유로(2021년 10월 기준)로 50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1년 수업을 듣는다 하면 그리 비싼 금액은 아니다. 에꼴 뒤 루브르 청강 교육 과정은 너무나도 인기가 좋아서, 10년을 넘게 등록하는 학생들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청강생의 수업료는 문화부의 지원과 함께 학교의 주 수입원이 되었다. 저렴한 대학 등록금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특성상 정부에서 대부분의 예산을 지원함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늘 예산 부족에 시달리는데, 연 50만 원도 되지 않은 금액이 모여 학교의 주 수입 중 하나가 될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등록하기에 그게 가능할까? 저렴한 금액 때문인 걸까 수업의 질 덕분인 걸까, 루브르가 주는 아우라 때문일까 혹은 예술에 대한 무한한 관심 때문일까, 아니면 이 모든 이유 때문인 걸까? 어쩌면 이 질문을 위한 대답에도 같은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교육.
에꼴 뒤 루브르가 예술 작품에 대한 지식과 의미, 예술작품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은 1882년 창립된 이래 학교의 두 가지 사명 중 하나이다.
에꼴 뒤 루브르 청강생 프로그램 북에서 발견한 익숙한 문장이다. 1882년 1월 24일 쥘 페리(Jules Ferry)의 뜻에 따라 처음에는 '박물관 관리 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에꼴 뒤 루브르는 고고학과 미술사를 위한 실용적(여기서도 실용적 pratique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학교였다. 역사학자이자 에꼴 뒤 루브르의 공동 설립자로서 학장을 역임하고 보고서에서 에꼴 뒤 루브르라는 이름을 처음 언급한 루이 니코 드 롱쇼(Louis Nicod de Ronchaud)는 에꼴 뒤 루브르가 큐레이터와 박물관 관리자를 양성하는 것만이 아닌 고고학 발굴자, 미술 평론가, 대중에게 지식을 보급하는 사람, 교수 등을 길러내어 고고학과 미술사의 모든 분야에서 학문에 봉사하는 젊은 학자의 양성소가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러한 학자들이 주도하여 루브르 박물관 컬렉션을 보존하여, 젊은 청중들에게 박식함이라는 보물과 루브르 컬렉션이 갖는 보물을 동시에 공개할 뿐만 아니라 연구를 통해 그들이 얻은 지식을 청중들에게 자유롭게 공유하게 될 수 있기를 원했다.
이렇게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에꼴 뒤 루브르의 사회 교육은 문화 보급이라는 학교의 오래된 사명의 일부이다.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 méthodologie라는 방법론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하는 의미에서 처음 몇 시간 동안 학교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수업은 13구에 있는 bâtiment Le France라는 곳에서 열렸는데, 학교에 할당된 공간의 복도 한 켠에는 콘퍼런스를 알리는 1800년대, 1900년대의 포스터가 쭉 붙어있었다. 그 포스터에서 누구나 콘퍼런스를 들을 수 있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바로 그때부터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교육의 시작이었다. 이곳에서는 수업을 콘퍼런스라고 부르고, 교수는 연구 책임자라 부르며 콘퍼런스에 참석하는 사람은 청강생, 학생으로 나뉜다. 학교는 학생에게 까다롭고 많은 것을 요구하기는 하지만, 또한 교육에 접근하기 위한 조건을 두지 않을 정도로 민주적이기도 하며, 독학을 자유롭게 환영한다.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나이, 학력, 국적을 따지지 않는다.
대학 수업과는 조금 생뚱맞은(?), 나와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캠퍼스의 백발이 성성한 프랑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모습은, 연간 약 30만 원의 학비를 내고 무상교육에 가까운 프랑스의 교육 혜택을 받았던 외국인인 나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비록 이제 비유럽권 학생은 15배나 더 학비를 내야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