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시험, 떠들썩한 철학 — 두 교육의 얼굴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간다. 주프랑스한국문화원에서 프랑스 언론에 실린 한국 기사를 수집하는 일을 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은 유럽 언론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자포니즘의 일본, 시누아즈리의 중국, 그리고 항상 뉴스의 중심에 있던 북한 사이에 낀 한국의 존재감은 희미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독 눈에 띈 건 '교육'이었다. 프랑스 언론은 'suneung'을 그대로 사용하며, 수능날 도시가 멈추는 장면을 신기한 듯 묘사했다. 비행기가 이륙을 멈추고, 출근과 채용이 늦춰지고, 온 나라가 긴장감과 정적 속으로 들어가는 하루. 프랑스 언론의 시선 속에서 그날의 한국은 언제나 낯설고, 이례적이며, 심지어 충격적이었다.
수능 날의 한국은 하나의 거대한 시험장처럼 움직인다. 도로가 비워지고, 공사장은 멈추며, 방송국은 시험 관련 뉴스로 하루를 채운다. 수험생만이 아니라, 온 사회가 함께 시험을 치르는 듯하다. 나 역시 이런 특별한 연대를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 수능 시험장으로 향하던 길, 예상치 못한 접촉사고가 났다. 수험생이 탔다고 하자, 상대편 운전자는 아무 말 없이 길을 열어주었다. 이렇듯 시험은 단지 대학 입학을 결정하는 절차가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의식이었다. 개인의 노력 위에 공동체의 질서가 덧입혀진 집단적 성취의 구조. 한국의 입시 풍경은 이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의 대학 입시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는 정반대의 풍경이다. 시험이 시작되면 조용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전국이 들썩인다. 그 이유는 매년 공개되는 철학 시험 문제 때문이다. “정의란 불의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가?”, “시간을 피하는 것이 가능한가?” 같은 질문이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카페마다 토론이 이어진다. 학생들만의 시험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생각하는 축제의 날이다. 문제에는 정답이 없고, 답안은 논리와 사유의 전개로 평가된다. 이 시험은 단 한 번의 채점보다, 사유의 과정을 기록하는 훈련에 가깝다.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처음부터 나는 이 사고방식에 부딪혔다. 논술로 대학에 합격했다고 자부하던 나였지만, dissertation이라는 프랑스식 논증문 앞에서는 매번 막막했다. 정해진 틀 없이 스스로 논지를 세우고, 반론을 제시하고, 다시 자기 관점을 구축하는 과정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건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의 문제였다. 프랑스에서의 공부는 결국 사유의 언어로 전환하는 훈련이었다.
평생을 주입식 교육에 몸을 담그다 석사 1학년, 사유의 세계에 갑자기 내동댕이쳐졌다. 유학 중 가장 힘들었던 건 언어도, 생활도 아닌 '사고의 격차'였다. 어릴 때부터 수많은 예술작품을 보고 자라며 '자신의 역사'를 공부하고 논리적 사고에 익숙한 프랑스 학생들, 그리고 교수들 사이에서 나는 유치원 수준도 안 되는 신생아 같았다. 대학원 2년만 잠시 맛본 그 세계를, 나는 몇 년 전 번역한 프랑스 동화 <오늘도 멋진 생각이야(La philosophie koala)>를 통해 다시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코알라다. 코알라는 친구 새와 카멜레온과 함께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일상의 문제들을 탐구한다. “시간은 왜 소중할까?”, “동정심이란 무엇일까?”, “모든 것에는 끝이 있을까?” 아이들이 평범한 하루 속에서 마주하는 주제들이 짧은 이야기로 이어진다. 정답은 없다. 대신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과정이 바로 배움이 된다. 작가는 그 과정을 통해 ‘생각하는 법’이란 곧 ‘함께 질문하는 법’임을 보여준다. 질문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프랑스 교육의 근본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한국 교육은 나쁘고, 프랑스 교육은 좋다'는 단순한 이분법에 갇혀 있었다. 그 오래된 선입관이 깨진 건 자크 아탈리의 <인류를 성장시킨 교육의 역사(Histoires et avenirs de l'éducation)>를 번역하면서였다. 이 책에서도 한국은 ‘우수한 결과와 많은 비극을 발생시키는 냉혹한 경쟁’으로 설명된다. 놀랍게도(혹은 슬프게도) 작가는 '삼당사락(사당오락이 아니라)'을 인용하며 "매일 밤 3시간을 자면 SKY 대학에 합격할 수 있고, 매일 밤 4시간을 자면 다른 학교에 합격한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특히 고등학교 3학년 때 매일 밤 5시간 이상을 잔다면 대학에 입학할 거란 생각을 버려라"는 무시무시한 문장까지 덧붙였다.
그러나 이 책은 한편으로 한국의 높은 교육 인프라와 성취도 함께 다룬다. 한국 청소년의 약 97%가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청년 70%가 전문대를 포함한 고등교육을 이수한다는 사실이다. 이 수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물론 그것이 경쟁의 고통을 정당화하거나 완화하지는 못하지만, 나 역시 그 체계 속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았고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기반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 성취를 보이는 한국의 수치 옆에, 여전히 초등교육조차 받지 못하는 1억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현실을 어제오늘 본 것도 아니었는데, 이 책을 번역하던 순간 그 숫자들은 더 이상 통계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얼굴들이 되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한국의 교육은 분명 치열하고, 때로는 잔인하지만, 동시에 놀라운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을. 결국 문제는 '좋다'와 '나쁘다'의 구분이 아니라, 어떤 사회가 어떤 이유로 그 방식을 택했는가에 있었다.
한국과 프랑스의 입시 풍경은 여전히 대조적이다. 한국은 조용한 집중의 나라, 프랑스는 떠들썩한 사유의 나라다. 하지만 두 나라는 결국 ‘배움을 통한 성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인류를 성장시킨 교육의 역사>에서도 강조하듯, 교육은 어느 나라의 방식이 더 옳다고 말할 수 없다. 각자의 사회와 시대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경쟁과 사유, 효율과 자유, 집중과 토론은 각자의 시대가 요구한 인간의 초상이다.
한국의 교실은 성취를 통해 성장하고, 프랑스의 교실은 사유를 통해 성숙한다. 둘 다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에서 출발한다. 결국 교육의 본질은 정답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려는 태도에 있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과연 우리는 오늘, ‘옳은 답’을 배우고 있는가,
아니면 ‘옳은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우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