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가의 집념이 어떻게 문화적 토양이 되는가
2021년 가을, 서울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은 한국 사회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개인이 평생에 걸쳐 모은 2만 3천여 점의 미술품과 문화유산이 국가에 기증되면서 ‘세기의 기증’이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국보 <인왕제색도>, 보물 <천수관음보살도>, 이중섭의 <황소>에서 모네와 달리에 이르는 이 방대한 소장품은 단순한 수집이 아니라 시대를 넘어선 문화적 사건이었다.
전시는 처음엔 예약조차 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피튀기는 예매 전쟁에서 성공한 끝에 방문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나는 20세기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주로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중심이었지만, 이 경험은 나로 하여금 프랑스에서 접했던 또 다른 수집가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2019년 파리. 루이뷔통 재단에서 열린 코톨드 컬렉션 특별전은 영국의 기업가이자 후원자 사무엘 코톨드가 모은 인상파 명작들을 다시금 세상에 보여주었다. 60점 남짓한 작품 속에는 모더니티의 전환기를 이끈 화가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 전시는 세르게이 슈킨, 모로조프 형제 등 세계적 수집가들의 컬렉션 전시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안목과 집념이 어떻게 예술사의 전환점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그 무렵 나는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진품을 직접 보며 자란 프랑스 학생들과 같은 무대에서 경쟁해야 했다는 점이었다. 그들에게 미술사 공부는 곧 ‘자신의 역사’를 탐구하는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타인의 역사’를 따라잡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코톨드 전시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왜 이런 환경 속에서 공부하지 못했을까'라는 푸념을 SNS에 남기기도 했다.
시계를 더 뒤로 돌려, 2017년 퐁텐블로에서 열린 한 경매는 문화유산의 또 다른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나폴레옹이 대관식에 쓰려 했던 황금 월계수 잎사귀가 경매에 나왔고, 루브르 박물관은 치열한 경쟁 끝에 같은 금세공인이 만든 남성용 보석함을 낙찰받았다. 그 순간 청중들은 기립 박수로 환호하며 “프랑스에 남아 다행”이라는 사회자의 말에 공감했다. 문화유산을 ‘국가의 기억’으로 지켜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날의 박수는 웅변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과 몇 해 뒤, 한국에서도 ‘세기의 기증’이라 불린 이건희 컬렉션 전시가 현실이 되었다.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도 어린 세대가 어릴 때부터 국경을 넘어선 걸작을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가 마련되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나에게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신축 건물보다도 더 큰 변화처럼 느껴졌다.
이 변화의 흐름은 2022년 과천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로 이어졌다. 샤갈, 달리,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미로, 고갱, 그리고 피카소의 도자에 이르기까지, 파리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거장들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에서 이런 전시를 직접 경험한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더 나아가 국립중앙박물관은 2023년부터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과 협력해 ‘세계문화관 그리스·로마실’을 4년간 운영하고 있다. 과거에는 일시적으로 한두 점의 유물이나 그림을 빌려오는 데 그쳤다면, 이제는 세계적 박물관이 한국에 장기 대여를 맡길 정도로 신뢰와 위상이 높아진 것이다.
한 평론가는 좋은 컬렉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대한 관심, 높은 안목, 결단력, 그리고 재정적 능력 네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곧 이건희가, 또 루브르 박물관이 보여준 태도와 맞닿아 있다. 문화유산은 단순히 돈으로만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에서 비롯된다.
한국에서 세계적 명작들을 직접 만나는 경험은 이제 더 이상 꿈같은 일이 아니다. 한 개인의 집념이 남긴 거대한 유산은 국경을 넘어 문화 교류의 장을 넓히고 있고, 다음 세대를 길러낼 문화적 토양이 된다. MoMa, 세르게이 슈킨, 코톨드, 모로조프에 이어 언젠가 루이뷔통 재단의 수집가 시리즈에 ‘이건희’의 이름이 당당히 오를지도 모른다. 그날의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 바로 문화유산을 사랑하고 지켜내려는 우리의 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