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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쥐와 서울 쥐

이기주의와 순응 사이, 두 도시를 통해 보는 인간의 얼굴

by Jasmine

쥐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나는 유난히 그들을 싫어한다. 아니, 무서워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어릴 때 부산의 항구 창고에서 짐(아마도 풋사과)을 가지러 갔다가 쥐를 본 기억이 있다. 그날 이후 한동안 풋사과를 먹지 못했다. 풋사과는 죄가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 쥐가 있었다’는 사실이 사물 전체를 오염시킨 듯 느껴졌던 것이다. 내 기억 속에서 쥐는 언제나 인간의 세계와 야생의 세계, 그 경계에 있었다.




그러니 쥐 공포증 환자가 파리에서 산다는 건 꽤 잔인한 일이었다. 빛의 도시라는 말이 무색하게, 파리는 해가 지면 쥐의 왕국이 된다(물론 낮에도 당당히 돌아다닌다). 퇴근길마다 에펠탑을 지나던 나는 어느 날 그 공원을 질주하는 쥐 떼를 보고 말았다. ‘도대체 저 당당함은 뭐지?’ 사람 발소리에 놀라지도 않는 그 태도는 마치 도시의 주인이 바뀐 듯했다. 그날 이후 나는 깨달았다. 쥐조차 도시의 성격을 닮는다는 것을.


쥐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이 많지만, 가장 최악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의 만남이었다. 바로 샹젤리제 거리의 한 레스토랑. 식당 안을 가로지르는 생쥐 한 마리,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 종업원에게 항의하듯 말을 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C’est Paris.” - 여기는 파리니까요. 그 한마디에 모든 게 담겨 있었다. ‘이 정도는 괜찮다’는 여유와 ‘남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태도. 나는 분명 놀랐는데, 그들의 반응은 너무나 평온했다. 그날 이후 파리의 쥐가 달리 보였다.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파리라는 도시의 태도를 닮은 존재였다.


반면 한국의 쥐는 놀라울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사람 그림자만 비쳐도 재빨리 숨어버린다. 한국의 쥐는 파리의 쥐보다 훨씬 작고, 무엇보다 눈치를 본다. 마치 “사람들이 불편해할까 봐” 미리 사라지는 것처럼. 도시의 위생보다 체면이 더 중요한 나라에서 쥐조차 배려심이 많은 셈이다. 그걸 보고 나는 파리에 있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파리 쥐는 참 당당한데, 한국 쥐는 눈치가 많아. 소심하다기보다… 파리 쥐는 주제를 모르고, 한국 쥐는 주제를 아는 것 같아.” 말하고 나서 나 스스로도 웃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두 도시의 쥐는 그 사회의 인간을 닮아 있었으니까.


스크린샷 2025-10-07 오후 10.35.39.png 아름다운 야경에 숨어있는 민낯, 쥐의 천국 파리





나는 오랫동안 자유를 찾아 프랑스를 꿈꿔왔다. 결국 도착한 그곳에서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삶’이야말로 진짜 해방이라고 믿었다. 하고 싶은 말은 하고,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들. 그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그러나 그 믿음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거리는 잠시 고요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사람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센강변에는 조깅하는 이들이 늘었고, 공원에는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처음엔 그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될 텐데, 왜 저렇게까지 나다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삶이 꼭 자유로운 건 아니라는 걸. 때로는 무책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팬데믹의 물결 속에서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도시의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놀라울 만큼 조용한 거리, 모두가 정부의 지침을 따르는 모습. 도시 전체가 하나의 신체처럼 움직였다. 그 질서 정연함이 처음엔 놀랍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곧 묘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도시, 다르게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회. 특히 백신 패스가 도입되었을 때, 그 차이를 더욱 실감했다. 프랑스에서는 논란의 중심인 제도가 한국에서는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 조용한 순응이 낯설게 느껴졌다.


문득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프랑스의 égoïsme, 즉 ‘이기주의’. 한때 그들의 자유가 이기적으로 보여 실망했지만, 돌이켜보니 바로 그 이기주의 덕분에 프랑스 사람들은 ‘보건 패스’에 반대하며 거리로 나설 수 있었다. 그들은 단지 자기 욕심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할 자유’를 지키려 했던 것이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자유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프랑스의 쥐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듯, 프랑스 사람들도 권위나 여론 앞에서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물론 그 자유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질서를 잃은 자유는 방종이 되고, 책임 없는 발언은 혐오로 번질 수 있다. 그래도 자유의 도시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은 조금 덜 갑갑하다.


질서와 자유, 그 사이의 균형은 언제나 어렵다. 질서가 지나치면 사람은 생각하기를 멈추고, 자유가 지나치면 타인을 배려하지 못한다. 눈치를 많이 보는 한국 사회가 답답해 프랑스로 떠났고, 그곳에서 나는 눈치를 보지 않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완전한 해방은 아니었다. 결국 인간은 자유와 질서 사이에서 끝없이 균형을 연습하는 존재다. 우리는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지만, 가끔은 눈치 보지 않고 말해야 한다.






이따금 생각한다. 파리의 쥐와 서울의 쥐, 그리고 팬데믹 속의 인간은 얼마나 닮아 있는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으려 애쓰는 존재들. 팬데믹이 끝나도 그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질서를 따르고, 누군가는 자유를 좇는다. 도시의 청결이 쥐의 유무로만 결정되지 없듯, 사회의 건강도 목소리의 크기로 증명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의식하며, 동시에 얼마나 자유롭게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결국 도시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을 닮는다. 자유와 질서 사이, 그 좁은 틈에서 인간은 오늘도 살아가며 공존을 배워간다.




L'Egoïsme_personnifié.jpg '인격화된 이기주의', <Le Bon Genre>에 실린 1800년경의 풍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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