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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파리를 꿈꾼다

배움은 나이를 묻지 않는다 - 프랑스의 청강 제도와 열린 교육의 풍경

by Jasmine


석사 수업 첫날, 나는 낯선 풍경 앞에서 잠시 얼어붙었다. 나만 빼고 학생은 전부 백발의 어르신들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라 부르기에 손색없는 이들이 교수의 말을 열심히 받아 적고, 토론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처음엔 늦깎이 대학생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그들이 ‘청강생(Auditeur libre)’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식 등록생도, 시험을 치르는 학생도 아니었다. 그저 배우는 게 좋아서 스스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한국의 대학에서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솔직히 처음엔 조금 당황했다. 석사 수업이라 긴장하며 들어갔는데, 옆자리엔 점심시간에 손주를 픽업하러 가야 할 것 같은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게다가 나만 동양인이었으니, 존재 자체만으로도 눈에 띄었다. 튀기 싫어하는 나로선 수업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하지만 수업이 시작되자 곧 생각이 바뀌었다. 할머니들은 발표자는 아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들었고, 발표가 끝나면 “그 부분은 다른 논문에서 이런 식으로 보더라”라고 척척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조차 살짝 긴장하기도 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진짜 공부는 나이도, 학위도, 시험 점수도 상관없는 거구나.






내가 대학에 입학한 지도 어느새 20년이 되었다. 삼수를 했으니 실제로는 조금 늦게 시작했지만. 그 시절의 대학은 지금보다 훨씬 닫혀 있었다. 수강신청은 전쟁이었고, 누가 더 빨리 졸업하느냐, 더 높은 학점을 받느냐가 늘 중요한 목표였다. 그래서 프랑스 교실은 낯설었다. 시험도, 경쟁도 없었다. 배우고 싶으면 듣고,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토론에 끼어드는 구조였다. ‘누가 더 빨리 배우느냐’보다 ‘누가 더 오래 배우느냐’가 중요한 곳. 이상하게도 그 여유가 부러웠다.


프랑스의 대학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나이, 학력, 국적의 제한 없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등록할 수 있다. 내가 다녔던 EPHE(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는 이런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학교였다. 1868년 설립 당시 법령 제3조에는 “입학에 나이, 학년, 국적의 조건을 두지 않는다”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미 19세기 후반에 ‘열린 교육’을 제도화한 셈이다. 교수는 일방적으로 강의하지 않고, 연구실 단위로 세미나를 운영하며 학생들과 대화로 수업을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학교의 이름 ‘Pratique(실용적)’이야말로 프랑스식 인문주의의 핵심 같았다.


EPHE뿐 아니라 프랑스의 대부분의 대학은 청강 제도를 통해 일반 시민에게 문을 연다. 등록금은 1년에 150유로(EPHE 2025년-2026년 학기 기준. 아마 수업당 등록금일 것이다), 학점도, 증명서도 없지만 누구든 강의실에 앉을 수 있다. 미술사와 고고학의 요람인 에콜 뒤 루브르(Ecole du Louvre)에도 청강 과정을 위한 전용 커리큘럼이 있다. 루브르의 큐레이터가 직접 강의하고, 청강생은 학생증을 받아 루브르·오르세·오랑주리 미술관을 무료로 방문할 수 있다. 몇 년씩 등록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을 만큼 인기 있는 제도다. ‘예술을 대중에게’라는 쥘 페리의 구호가 140년이 지나도 여전히 현실에서 살아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교실이 특별한 건 청강생만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에콜 뒤 루브르나 소르본 대학 학생들도 학점 교류를 통해 함께 수업을 들었다. 한국의 연세대·이대·서강대 학점 교류제도처럼 파리의 여러 대학도 서로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어느 날엔 백발이 성성한 중년 남성이 새로 들어왔는데, 그는 청강생이 아니라 진짜 석사 과정 학생이었다. 프랑스에는 직장인을 위한 전문 석사(Master professionnel) 제도도 있어서, 일하면서 주말마다 공부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파리 도핀 대학의 문화경영학 석사처럼, 미술사 전공자들이 현장에서 일하며 경영을 배우기도 했다. 그 다양한 상황 속에서 나는 ‘배움’이라는 단어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실감했다.


요즘 한국에서도 평생교육과 시민대학이 늘고 있다. 도서관이나 지자체에서 인문학 강좌를 여는 걸 보면 사회가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여전히 “공부는 젊을 때 하는 것”이라는 인식은 완전히 바뀌지 않았다. 프랑스의 교실에서 만난 백발의 학생들은 그 오래된 편견을 부드럽게 깨뜨렸다. 배우는 나이는 따로 없다는 걸, 그들이 매일 증명하고 있었다.



1890년대 말 파리 소르본 대학의 키네 원형극장에서 역사 및 언어학 부문 연구 책임자인 폴 파시가 음성학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 Archives EPHE





처음엔 그 풍경이 조금 생뚱맞게 느껴졌다. 석사 수업의 한편, 백발의 청강생들이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은 낯설었다. 왜 그 나이에, 그것도 시험도 없는 수업을 들을까. 나는 그저 호기심 섞인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들에게 공부는 성취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알고 싶어서 배우고, 배우는 일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도 다르지 않았다. 연간 약 30만 원의 학비로 무상교육에 가까운 프랑스의 제도를 누리던 외국인으로서, 나 역시 그들처럼 ‘배우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교실에 앉아 있었으니까. 그들의 백발과 나의 젊음은 달랐지만, 배움 앞에서의 자세만큼은 같았다.


그리고 이제, 그 마음이 내 안에서 다시 깨어났다. 대학에 입학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나 또한 다시 파리에서의 공부를 꿈꾼다. 한국에서만 있었다면 ‘이 나이에 다시 공부를?’이라며 스스로 제동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그토록 다양한 나이와 배경의 사람들이 함께 배우는 모습을 봤기에, 지금의 나는 그 질문을 조금 다르게 바꿔 본다. “이 나이에 공부해도 될까?”가 아니라, “이 나이니까 더 배우고 싶다.” 배우는 일은 젊은 날의 특권이 아니라, 오래 살아남은 이들의 용기이기도 하다는 걸 이제야 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비유럽권 학생은 15배나 더 많은 학비를 내야 한다는 사실뿐. 덧붙여, 비싸진 등록금만큼 건강도 비싸졌다. 그래도 괜찮다. 배우고 싶은 마음 앞에서는 환율도, 체력도 잠시 잊어도 좋으니까.



지식은 닫힌 전공의 울타리 안에 있을 때 힘을 잃는다. 반대로, 누구나 들어와 참여할 수 있을 때 지식은 살아 움직인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소르본 대학의 강의실에서, 그리고 백발의 청강생들 사이에서 나는 그 사실을 배웠다. 교육은 나이와 직업의 경계를 넘어, 인간이 인간으로서 함께 사유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평등한 공간이었다.


Art. 3 École pratique에 입학하기 위해 나이, 학위, 국적에 대한 어떤 조건도 요구되지 않는다. 다만 지원자는 일정한 수습단계를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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