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10년 후, 파리의 기억으로 한국의 오늘을 보다
며칠 전, 코스트코에서 니캅을 쓴 여성을 마주쳤다. 그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10년 전 파리 테러 당시의 공포가 몸속 어딘가에서 되살아난 것 같았다. 나는 그 감정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내 안의 기억이 먼저 반응했다.
2015년, 파리는 두 번의 대형 테러로 깊게 흔들렸다. 1월, 샤를리 엡도 테러는 프랑스가 자랑하던 '표현의 자유'를 향한 총격이었다. 풍자를 죄로 여긴 총알이 언론사 편집국을 향했고, 그날 이후 프랑스는 “Je suis Charlie(나는 샤를리다)”라는 슬로건 아래 자유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그 구호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두려움이었다. 그날 나는 학교 캠퍼스 안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지하철 안은 유난히 조용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긴장 속에 앉아 있었다. 그날 이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인지를 처음으로 배웠다.
그해 11월, 바타클랑 극장에서 또다시 총성이 울렸다. 그날 밤에는 집에서 뉴스를 보며 밤을 새웠다. 남편은 잠들어 있었고, 나는 새벽까지 휴대폰을 붙잡은 채 한국의 가족들과 파리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잠시 눈을 붙이고 아침이 되어 밖으로 나왔을 때, 골목 모퉁이에서 니캅을 쓴 여인 두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전날 밤의 뉴스가 다시 현실로 스며드는 듯했다. 한동안 바타클랑이 있는 11구에는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서울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고, 파리의 거리들은 여전히 그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그 변화의 속도가 도시의 내면을 그대로 닮아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는 급격히 다문화의 시대로 진입했고, 프랑스는 여전히 이민과 종교, 표현의 자유라는 오래된 문제 위에서 흔들리고 있다. 외형은 변했지만 속은 낯설어졌고, 외형은 그대로지만 속은 여전히 불안했다.
늘 유럽으로 떠나고 싶었던 나는 한국에서도 자발적 '이방인'의 삶을 살았다. 프랑스에서는 당연히 '이민자'였기에 그런 삶에 익숙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원주민'의 눈으로 이방인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때는 프랑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외국인에게 까다로운지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낯선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은 단순한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자신을 지켜내는 방식이기도 하다는 것을.
다시 2015년 겨울, 파리의 거리는 한 문장으로 뒤덮였다. Fluctuat nec mergitur. -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는다. 센 강을 따라 늘 흔들리지만 결코 침몰하지 않는 범선, 그것이 도시의 상징이었다. 시민들은 그 문장을 다시 꺼내 들었다. 벽에, 포스터에, SNS에, 그리고 일상의 대화 속에. 그 다짐은 비극을 견디는 파리의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하지만 그 문장은 단지 회복의 구호가 아니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파리는, 프랑스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2015년 샤를리 엡도 테러 이후, 바타클랑에서 스타드 드 프랑스까지, 니스에서 마냥빌까지(IS 추종자, 프랑스 경찰 부부 살해), 생테티엔뒤루브레(IS 추종자, 성당에서 인질극 벌이고 신부 살해)에서 콩플랑생토노린(프랑스 역사 교사 사뮈엘 파티 참수 사건)과 아라스(체첸 출신, 학교에서 흉기 공격으로 교사 1명 사망)까지, 프랑스는 이 '절대적인 야만성'에 끊임없이 직면해야 했다. <르몽드>는 올해 초 사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유와 보편의 가치는 한 번 얻으면 끝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깨어 있는 의식과 시민의 참여로만 유지된다.” 그 말은 프랑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프랑스가 지난 10년간 마주한 것은 그저 테러의 위협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신념과 생활양식, 종교와 가치관이 한 사회 안에서 충돌할 때, ‘자유’와 ‘관용’이라는 이상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가에 대한 시험이었다. 한국 역시 이제 그 경계에 서 있다. 서울의 거리에는 외국어 간판이 넘치고, 지하철 안에서는 여러 언어가 동시에 들린다. 한국은 ‘이민 가는 나라’에서 ‘이민 오는 나라’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한국은 일자리와 교육의 기회를 주는, 새로운 희망의 땅이다. 문제는, 그 속도를 따라가야 할 우리의 인식이다.
프랑스는 오랜 세월 ‘공화국의 보편 가치’ 아래 모든 국민이 같은 시민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언어와 교육을 통해 하나의 국민으로 길러내려 했지만, 정작 그들이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 실질적 제도는 만들지 않았다. 모두가 이미 프랑스인이라는 이상이, 오히려 차이를 지우는 폭력이 되기도 했다. 파리는 여전히 통합과 갈등 사이에서 흔들린다.
프랑스의 경험은 말한다. 공존은 무조건적 보편성이나 완전한 관용이 아니라, 차이를 제도와 교육의 틀 안에서 조율하려는 균형 위에서 유지된다는 것을. 한국은 지금, 다문화의 확장 속에서 새로운 균형의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외국인을 향한 배려가 늘어날수록, 정작 자국민은 자신이 소외된다고 느낀다. 공존의 이름 아래 형평이 무너질 때, 사회의 불만은 혐오로 바뀐다. 관용이란 경계가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하나의 사회로서 공유할 규칙과 책임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 공존은 사랑이 아니라, 질서 위에서 유지되는 합의의 기술이다. 그것이야말로 프랑스의 사례를 거울삼은 우리가 ‘흔들려도 가라앉지 않을’ 방법이다. 공존은 환대의 구호가 아니라, 준비의 결과다. 준비 없는 관용은 분열을 낳고, 기준 없는 평등은 불신을 키운다. 우리는 지금, ‘흔들리되 가라앉지 않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파리의 문장은 또다시 내게 말을 건다.
Fluctuat nec mergitur.
그 문장은 더 이상 도시의 슬로건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방식의 은유가 되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사람은 다시 살아간다. 나는 한때 이방인이었고, 이제 이방인을 맞이하는 사람이 되었다. 파리가 내게 남긴 건 공포가 아니라, 공존을 지탱할 용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