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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쌤 Mar 17. 2020

와튼 MBA를 졸업하다. 백수로. <1>

눈앞의 모든 문이 닫힌 후에야 보이는 길

백수라니. 스물셋부터 일을 해 왔는데. 원래 잠들면 업어가도 모르는 타입이었지만, 몇 달간 매일 밤 뒤척였다. 칠 년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왜 나는 직장 없이 졸업하게 된 걸까. 다른 전공도 아니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장할 거라 믿었던 비즈니스 스쿨, 그것도 세계 top 3 MBA 중 하나라는 와튼스쿨에서.




나름대로 변명은 있었다. 첫째, 하필이면 2010년에 졸업했다. 그것도 원래는 2007년에 입학했으니 2009년에 졸업했어야 하는데,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으며 1년 휴학해서 동기들보다 늦게 졸업했던 것이다. 2008년에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MBA 취업시장을 급속도로 냉각시키는 걸 본 터라, 1년 쉬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하는 얕은 계산도 있었다. 꼼수는 해결책이 아니란 엄마 말은 진리였다. 뚜껑을 열어보니 2009년보다 한층 더 나빠졌다. 처음에는 우왕좌왕하던 미국 대기업들이 1년 새 취업 관련 규정을 재정비한 것이다. 외국인 채용 규모 자체도 확 줄었을 뿐 아니라, 원서를 낼 수 있는 자격을 영주권/시민권자 이상으로 못 박는 회사가 급증했다. 늘 자부심이 뚝뚝 떨어지던 학교의 취업 보고서는 내가 졸업하던 2010년 유례없이 짧고 겸손했다. 학교 측은 나 같은 실업자의 비율을 조금이라도 적게 보고하고자, '취업 기회를 모색하는 학생'과 '모색하지 않는 학생'으로 나누고, 게다가 '취업 설문에 응하지 않는 학생'이라는 항목까지 만들었다. 원래 회사에서 지원을 받아 유학 온 사람을 제외하면 취업을 못했거나 설문 요청에 대답조차 하지 않은 학생(빈정 상한 내가 여기에 속했다)이 전체의 20% 정도에 달했다. 참고로 가장 최근 보고서에 의하면 이 숫자는 대략 5%로 떨어졌으니 2010년이 어렵긴 했나 보다. 솔직히 별반 위로가 되진 않았다.


두 번째, 애초에 직업이 많지 않은 곳에서 기회를 모색했다. 연봉도, 업종도, 직무도 따지지 않던 내가 유일하게 가진 기준은 '지역'이었다. 같은 학교 박사과정 3년 차인 남편과 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뭐가 씌었는지 1학년이 끝나자마자 급하게 결혼을 하고 정확히 1년 후 첫딸을 낳았다. 불과 3개월 후에 금융위기가 닥칠 줄도 모르고. 와튼은 필라델피아라는 도시에 있는데, 비록 미국에서 5번째로 큰 도시라 해도 MBA를 채용하는 큰 회사가 별로 없었다. MBA는 MBA를 뽑는 직장, 자리가 아니면 취업하기 어렵단 걸 전혀 몰랐다. 그저 좋은 학교 나오면 어디서든 데려갈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필라델피아는 'MBA용 직장'이 동부에서 가장 많은 뉴욕으로부터 2시간, 매일 출퇴근 하기에는 부담이 되었다. 물론 뉴욕에 취업을 하고 거리상 중간 정도 되는 도시에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도, 남편도 매일 2시간 이상을 길바닥에 소모해야 하는 데다 아기를 돌보기에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또한 변명에 불과하다. 뉴욕에서 들어오는 오퍼를 거절한 적은 없었으므로.




딱 한 자리면 되는데 그 하나가 없을 줄이야. 동기들의 선망을 받으며 뉴욕 투자은행에서 인턴십을 할 때만 해도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시계를 앞으로 돌려 2008년 여름 인턴기간이 끝난 주의 일요일에,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했다. 나올 거라 기대했던 많은 채용 오퍼들이 반려되거나 취소되었다. (전년도 여름에 리먼으로부터 오퍼를 받고 입사를 목전에 둔 2학년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학교로 돌아온 2009년 가을, 나뿐 아니라 많은 2학년들이 다시 취업전쟁이 뛰어들었다. 묘한 동지애를 느꼈다. 경기를 감안해도 내가 낸 이력서를 보고 연락 오는 회사들도 적지 않았다. 30군데가 넘는 곳에 면접을 다니며 '설마' 했다. 동기들이 하나씩 취업전선에서 승리할 때마다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하지만 레이스가 끝났을 때, 나는 아직도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채 출발선상에 남겨져 있었다.



처음 겪는 패배감이었다. 공인회계사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터라 백수는 나와 영영 먼 단어일 줄 알았다. 후배를 두 번 받을 때까지 팀에서 제일 어렸던 나다. 내가 자의로 휴직한 적은 있어도 아무도 나를 원치 않을 줄이야. 그 많은 면접에서 왜 떨어졌는지 알 수 없기에 언제, 누가, 나를 다시 원하게 될 지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나의 커리어는 끝인가? 이제 집에서 아기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하는 게 내 숙명일까? 그것도 MBA 졸업하자마자? 막막했다. 한국에서 호기롭게 박차고 나온 직장동료, 선후배들은 날 얼마나 우습게 볼 것인가. 남편도, 아기도, 한국에서 마음을 졸이신 부모님도, 미래에 대한 내 불안을 지우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난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졸업식이란 게 학위 받는 것 말고도 동고동락했던 친구들과 같이 사진 찍고 하루를 즐기는 게 '맛'인데, 내 동기들은 1년 전에 이미 졸업했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그럴 만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졸업 후에도 여전히 업종, 직종 가리지 않고 주변 회사들에 계속 원서를 썼고, 간간히 들어오는, 하지만 점차 줄어드는 면접 기회에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투자은행에서 좋은 관계를 맺어둔 인사팀 친구를 비롯, 몇 안 되는 미국의 인맥도 최대한 활용했다. 왜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부탁하지 않느냐는 남편의 말에 필라델피아 주변의 동문들에게 연락을 해 보기도 했다. 자존심 강한 내 성격에, 게다가 당시 좌절감과 상처에 가득 찬 상태를 고려하면,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때 연락이 닿았던 어떤 동문은 나를 채용하지는 않았지만 내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부하직원(역시 동문)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리튼하우스 스퀘어라는 작은 공원, 그 앞의 ROUGE라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중년의 아시안 남자였는데 솔직히 좀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사장님 명령이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 굳이 나왔을 것 같진 않았다), 친절하게 내가 어떤 분야로 진출하고 싶은지 이야기해주면 자기가 아는 동문들을 소개해 주고, 기회도 함께 찾아봐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순간 나의 가장 큰 문제를 깨달았다.




10년이 지났다. 난 그 사이에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 사랑하는 아이 둘이 커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보기만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목표가 주어지면 성실하게 해 내는 사람에서,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했다. 모든 문이 눈앞에서 닫히는 순간, 비로소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내가 발견했던 내 문제들과 그에 대해서 나름대로 조종 키를 돌려 항해해 온 여정을 나누고자 한다. 똑같은 문제가 정말 많은 사람들의, 가장 예측 못한, 가장 연약한 순간에 뒤통수를 치는 걸 무수히 봐 왔기에. 내가 겪은 걸 당신은 안 겪었으면, 어쩌면 안 겪을 수는 없더라도 조금은 덜 아팠으면 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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