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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쌤 May 23. 2020

점쟁이가 말리는 결혼, 제가 해 보았습니다

나쁜 궁합, 그래도 이 결혼 하시겠습니까?

결혼기념일이 다가온다. 12주년이다.


20대 때 워낙 사주 보러 다니길 좋아했다. 사주팔자 내용을 맹신했다기보다는, 커리어 초반, 싱글 여자로서 아직 인생의 불확실성이 많은 삶의 단계를 지나기가 고달플 때, 점쟁이가 해 주는 말이 잠시나마 위안을 줬다. 모든 게 괜찮을 거다, 다 잘될 거다, 잘 살 거다, 그런 말에 내 성격이나 과거에 겪었던 일들 몇 가지가 맞아떨어지면 "어머어머 족집게다!"라며 수선을 떨었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압구정 삐삐 도사라는 양반이 있었다. 목동 살던 내 베프와 같이 사주를 보고 나오니 새벽 1시 반. 우리도 미쳤다며 깔깔 웃고 친구를 택시 태워 보냈던 기억이, 사실 그날 들었던 사주풀이보다 기억에 남는다.


일종의 심리 테라피로 사주풀이를 봤다는 건, 그래도 대체로 알려주는 내용들이 나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은 까맣게 다 잊었다. 물론 시간이 오래 지나 그런 것도 있지만, 하나의 사건 때문에 점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내 결혼의 유일한 위기였던 궁합이다.


유학 중 7월에 만나 12월에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같이 한국에 들어갔다. 뭔가 내 결혼에 대해서 막연하게 비현실적인 기대를 갖고 계시던 부모님께 아직 남자 친구가 있다는 말조차 못 한 상태였는데, 간신히 비행기 탑승 전날에서야 운을 떼고 출국장에서 처음으로 인사시켰다. 인상이 나쁘지 않았는지 아빠가 다음 날 식사나 같이 하자는 말씀을 하셨다. 지금은 없어진 삼성동 양미옥이라는 곱창집에서... 그리고 남편은 그 곱창집 2층 룸 안에서 처음 뵌 지 24시간도 안된 우리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멘트를 날렸다. 식사 후, 바로 옆 호텔에 커피 마시러 가는 길. 5분 거리였지만 아빠가 "난 내 여자를 데리고 갈 테니, 너는 니 여자를 태우고 와라" 비슷한 말씀으로 초고속으로 결혼 승낙을 받았다. (아빠...근데 솔직히 너무 빨리, 쉽게 허락한 거 아니에요? 막 떠넘기는 것처럼. 영화 보면 꽐라 될 때까지 술도 먹여보고 그러던데...)


모든 것이 순조로운 듯했던 결혼 과정에 걸림돌이 등장했다. 5대째 독실한 기독교를 믿는 남편 집안과는 다르게, 우리 집안은 무교였기 때문에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 궁합을 보러 갔다. 이제껏 사주팔자를 보러 가서 나쁜 소리 들은 적이 없던 딸이니, 누구랑 살든 잘 살지 않겠냐며 장 보러 가듯 가볍게. 그런데 돌아온 엄마 표정이 밝지 않았다. 딸이 너무 아깝다고 했단다. 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주변에 수소문을 해서 두 번째, 세 번째 점쟁이에게 다녀왔다.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딸이 아까운 건 둘째 치고, 둘이 성격이 너무 안 맞는단다. 남편 될 사람은 너무 융통성이 없는데 강하고, 아내 될 사람은 너무 여리면서도 (읭?) 고집이 세 신혼여행 다녀오는 순간부터 사네 마네 하면서 집안에 큰소리 잘 날이 없다고. 십중팔구 후회할 결혼이라고 했다. 부모님은 고심 끝에 그다음 주로 예정된 상견례를 미루자고 했다.


결혼이라는 과정에는 후진이 없다.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가뭄에 콩 나듯 파혼했다가, 연기했다가도 결국 잘 사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대개는 미루거나 취소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그의 가족에게 거절당할 뻔했다는 그 상처는 나중에 같이 살더라도 트라우마로 남아 두고두고 서로를 괴롭히기 마련이다. 결국 당시 군생활 중이던 남동생의 휴가를 맞아 함께 식사하러 간 자리에서 남편에게 상견례를 미루자는 이야기를 꺼내셨다. 점쟁이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결혼 이야기가 나온 지 불과 일주일. 만난 지 불과 5개월. 그러니 좀 더 시간을 갖고 둘이 만나고, 성격이 잘 맞는지 아닌지 판단할 시간을 가지라는. 사실 틀린 말씀도 아니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건 안된다며 끝까지 다음 주 상견례를 강행할 것을 청했다. 부모님의 불편한 기색도, 침묵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식당에서 나와 우리 집(에 오란 말도 안 했는데) 거실에 앉아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아, 그 팽팽한 텐션이란. 나랑 내 동생은 질려서 말도 못하고 있었다. 결국 다음날 출근하셔야 하는 아버지가 먼저 일어나셨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빠르게 퇴장하시는 아빠를 따라가 '어떻게 해?'라며 다 들리는 복화술을 시전 하던 엄마, 결국은 아빠가 '그냥 예정대로 해'라며 이날의 대치는 남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사실 연애 초반 3개월은 정말 많이 싸웠기 때문에 걱정은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MBA 하는 서울 여자와 철학하던 경상도 남자의 조합. 필라델피아는 일방통행 도로가 엄청 많은데, 차  안에서 싸우다가 씩씩대며 신호 대기 중이던 차에서 내려버린 적도 있다. 남편은 나를 바로 쫓아오려 했지만 일방통행 때문에 멀리 돌아 돌아와야 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나도 조금만 간이 컸더라면 그냥 집에 가 버렸을 텐데, 필라델피아가 범죄가 많은 지역이고 한밤중이라 네 번째 울리는 전화는 못 이기는 척 받아 위치를 알려줬다. 하지만 연애 초반 3개월이 끝난 이후부터는 전혀 싸우지 않았다. 서로를 변화시키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그냥 적응하기로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가. 물론 부부가 살면서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있고, 유난히 꼴 보기 싫은 날도 있다. 부모님도 친구도 없는 해외에 살다 보면 의지할 데라고는 서로 뿐이라 그런 날은 더 힘들다. 내가 자기 하나 보고 이 먼 타국까지 와 있는데, 지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입이 댓발 나온다. 하지만 아무리 남편 그림자조차 보기 싫어도, 집에 안 가면 갈 곳이 없다. 이러저러해서 속상하다 이런 말을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하면 가슴만 아파하실 뿐이고, 한국의 베프에게 털어놓고 싶어도 친구는 시차 때문에 잔다. 지난 12년이 순탄하지만도 않았다. 처음에는 내 커리어 때문에, 나중에는 남편 커리어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다 (외노자의 설움이란). 32년도 아닌 고작 12년 살아놓고 입방정떨기 조심스럽지만, 어쨋든 신혼여행 다녀오는 순간부터 결혼을 후회한다던 점쟁이 말과는 다르게 다행히 아직은 그럭저럭 문제없이 살고 있다. 우리 부모님도 하나 밖에 없는 사위를 예뻐하시고, 깍쟁이 서울여자인 울 엄마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놀라울 정도로 편안하게 생각하신다.


그래서 결혼하면서 점을 끊었다. 물론 남편의 영향으로 신앙을 가지게 된 이유가 제일 크지만, 사실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마귀가 영을 더럽히네(?) 이런 생각보다는, 점괘란 게 결국 단편적인 해석일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주팔자는 결국은 8개의 한자로 나의 인생을 설명하는데 ‘나'라는 사람의 모습이 단 8개의 단면만 있는 게 아니고, 또 하나의 모습도 다양한 면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A라는 면과 상대방의 B라는 면이 합쳐져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남편 될 사람은 너무 융통성이 없는데 강하고, 아내 될 사람은 너무 여려서 할 말 못 하고 참기만 한다"는 점쟁이의 재단은 일부 맞고 일부 틀렸다. 남편은 본인의 연구 분야에만 융통성이 없다 (그마저도 큰 위기를 한번 겪고는 다행히 융통성을 많이 탑재했다). 그 외의 부분에는 융통성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 특히 오늘의 집안일을 내일로 미루는 부분. 내 생각엔 내가 조금 더 참고 집안일/육아는 더 많이 하는 것 같긴 하지만 (어느 집이나 그렇듯), 그렇다고 할 말 못 하고 살지 않는다. 결국 내가 하는 게 안 낫겠나 싶어 하더라도 툴툴거리고, 짜증 날 때는 참지 않고 표현한다 - 남편은 이에 대해서 맞장구를 쳐주며 반성하는 시늉을 한다. 무엇보다 점이란, 의뢰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기 마련이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점쟁이가 그나마 '이 결혼하면 누구 하나 죽어', 라든지 '두고두고 여자 문제를 일으켜' 같은 소리를 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급하게 잡느라 금요일, 그것도 낮 시간이라는 초강수를 둔 결혼식에는 700명 넘는 하객이 참석했다. 그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라도 앞으로 12년이 아니라 32년, 42년도 잘 살아야 할 텐데. 일단 내일 결혼기념일에 남편이 어떤 준비를 했는지 보면 대강 판단이 들 것 같다. (결코 남편에게 압박을 주기 위해 작성한 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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