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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쌤 Jul 08. 2020

마왕과 삐삐

 Here I stand for you

살면서 스친 적 한번, 인사 한 번 한 적 없어도, 누군가가 두고두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일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개학 첫날이라 왠지 내일부터 열심히 공부하려면 일찍 자야 할 것 같았다. 딱히 졸리거나 피곤하지도 않지만 애써 잠자리에 들었는데, 얼마 안 되어 집 전화가 울렸다. 10시가 넘은 시간, 무선 전화기를 넘겨주는 엄마 눈초리가 매서웠다. 전화를 건 친구는 깔깔 웃으며, 지금 설마 자는 거냐고, 왜 라디오 안 듣고 있냐며 다그쳤다. 얼떨결에 라디오를 켜니, 어머, 내가 별 기대 없이 보낸 사연의 끝자락이 소개되고 있었다.


신해철 님이 '마왕'이 되기 전, 그가 1대 ‘시장'으로 진행하던 ‘신해철의 음악도시’에 보낸 사연이었다. 20년도 더 된 이야기라 자세히 기억나지도 않지만, 어쨌든 키가 작아서 고민이라는 내용이었다. 엄마 손에 이끌려 한약도 먹어보고, 약국에서 간 영양제도 매일 사 먹어보고, 줄넘기도 해 보고, 매일 저녁 산책도 해 봤는데 키가 크기는커녕 설사병부터 건강한 돼지가 되는  부작용(?)만 겪고 있다는 그런 푸념이 담긴. 160cm은 돼야 되지 않겠냐는 엄마의 압박도 버거운데, 왜 하필 제일 친한 친구들은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 170cm를 넘겨 나를 더 난쟁이 똥자루처럼 보이게 하는지 괴롭다는 이야기. 그리고 사연의 맨 마지막에는, 내 삐삐 번호도 덧붙여 놓았다.


사연 앞부분은 놓쳤지만, 호탕하게 껄껄 웃는 시장님의 웃음소리는 놓치지 않았다. 한참을 웃은 그는, 다정다감하거나 세심하다기보다는, 시원하고 솔직한 그 다운 위로를 전했다. 그런 거 안 중요하다고, 남의 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자신감 갖고 살라고. 그 조언 덕분에 내 고민의 무게를 조금 덜어 낸 것 같았다. 게다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도 받았다 - 무려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청바지. 지금도 청바지 한 벌에 20만 원이면 비싼데, "20만 원 상당"이라고 라디오 광고에서 힘주어 말하던 그 청바지는 그 당시에 나로서는 사 달라 감히 조르지도 못할 정도의 사치품이었다.



기분 좋게 다시 잠자리에 누웠는데 이번엔 머리맡의 삐삐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내 노란색 모토로라 삐삐. 오밤중에 누구야, 라며 들여다보고 고장이라 생각했다. 내가 확인하는 와중에도 새로운 번호가 한 번에 20개씩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사흘간 나는 삐삐를 켜 놓을 수가 없었다. 쉴 틈 없이 계속 울리거나 진동하는 바람에. 음성메시지를 듣고서야 고장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전국에서 격려의 메시지가 쇄도하고 있었다. 마왕이 내 사연 끝에 달아놓은 삐삐 번호를 또박또박 불러준 덕분에. 발신자는 서울부터 제주까지, 한참 나이 많으신 분들부터 동생들까지, 나이도 지역도 성별도 다른 음악도시 애청자들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전남의 어느 세 자매 중년 아주머니들은 150cm도 안 되는 키로도 행복하게 잘만 산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합창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던 어떤 아저씨는 자기 대학생 딸 둘이 150cm 초반인데,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다고. 키가 작으면 재주가 많다며 (?) 고민할 필요 없다는 말씀. 내 또래들도 있었다. 속초인지 강릉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강원도의 어떤 남고 학생들 셋은 오는 토요일에 서울에 갈 테니 한번 만나자,라고 호기롭게 제안했다. 목소리가 앳된 여중생은 자기는 키가 큰데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작아서 고민이라고, 저도 언니처럼 아담하면 좋겠어요,라고 수줍게 고백했다. 삐삐의 음성사서함은 무척 짧아서, 어떤 메시지는 ‘어... 어...'만 하다가 끝나기도 하고, 어렵게 시작한 말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끊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겐 뭉클한 경험이었다. 한 명 한 명에게 고맙다고 답장하고 싶을 만큼. 새로운 번호가 너무 빠르게 들어오다 보니 번호와 메시지를 매칭 하는 게 불가능해서 그러긴 어려웠지만.


얼굴 모르는 낯선 사람들, 살면서 아마도 한 번도 마주칠 일이 없을 사람들. 한두 명도 아니고 백 명은 족히 넘는 사람들이 어린 학생의 고민거리 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직접 수화기를 들어 격려의 말을 남겨 주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타인의 일에 마음을 써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확인한 건 소중한 경험이었고, 아직 십 대였던 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 대해 믿음과 따뜻한 시선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왕에 대한 기억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여전히 160cm의 고지를 넘지 못했지만 내가 마왕의 말대로 별 걱정 없이 살고 있는 건, 어쩌면 그가 그날 보여준 살만한 세상 덕분일지도 모른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의 고뇌와 Here I stand for you라고 외치던 그의 노랫말 덕분에. 그의 평안한 안식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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