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돌파가 항상 최고의 해법은 아니더라
"친구들이 아무도 나랑 안 놀아줘." 순간 마음이 내려앉았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지 불과 4개월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놀란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아이에게 자세히 물었다. 쉬는 시간에 다른 여자 아이들에게 "나도 같이 놀아도 돼?"라고 하면 아이들이 '안된다'거나, '이 놀이는 넷이 해야 하는데 우리는 이미 네 명이 있으니 내일 끼워주겠다'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나 기약 없이 기다려 봐도 다음날도 같은 소리. 전년도에 단짝이었던 친구와는 다른 반으로 갈라졌는데, 친구가 인기가 많아져 같이 놀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방울방울 서러운 눈물이 맺힌 아이를 일단 재웠다. 지친 얼굴로 잠든 아이가 안쓰러워 마음이 아렸다. 하루 이틀 된 이야기도 아니던데, 왜 아이는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걸까. 아니, 아무리 일곱살짜리가 말을 하지 않았어도 엄마인 나는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자책했다. 동양인이 드문 학교라 우리에게 배타적인 걸까. 한국에 살았더라면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문제인데 우리 욕심 때문에 괜히 죄 없는 아이를 고생시켰나...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사실 최근에 아이가 부쩍 예민해졌다고 느끼고는 있었다. 아무래도 집에서 한국어를 주로 쓰다가 학교에서 영어로 생활하게 되어 주눅이 드는 모양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리라고만 생각했었다. 잠귀 밝은 남편이 깰까 소리 죽여 훌쩍거리다가, 쓰린 가슴을 붙잡고 밤새 기약 없이 뒤척였다.
다음날, 담임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그다지 안타깝지도, 놀랍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우리 반 여자애들 성격이 너무 세서, 따님은 걔들이랑 놀지 않는 게 차라리 다행이에요." 아무리 올해가 정년 마지막이라지만, 들으면서도 내 귀를 의심했다. 선생님을 의지할 수 없으니 당장 그 주말부터 같은 반 아이들을 하나씩 집에 초대하기 시작했다. 한 번이라도 우리 딸이 언급한 적 있는 아이라면 무조건 불렀다. 간식도 풍성하게 차리고, 미국에서는 팔지도 않는 화려한 색종이부터 장난감, 심지어 이 시골에서 구하기도 힘든 마카롱까지 사 넣은 구디백을 만들어 들려 보냈다. 하지만 그나마 우리 집에서는 어색하게나마 같이 노는 시늉이라도 했던 아이들은 야속하게도 학교에 가면 다시 지들끼리만 놀았다. 그애들도 고작 만 예닐곱살이었다. 늘 있는 듯 없는 듯했던 내 딸이, 주말에 몇 시간 봤다고 갑자기 달라 보일 리가 없었다. 어쩌다 초대받은 생일파티에 가 보면, 내 딸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겉돌기만 했다. 특별히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지만, 투명인간이나 다름없었다. 밖에서 쌓인 스트레스는 집안에서 과도한 짜증과 예민함으로 발전했다. 한국에 사는 친구 소개로 심리 상담까지 받을 지경에 이르렀다.
다른 학교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학교마다 분위기도, 학습량도, 학비도 천차만별이었지만 정작 날 가장 고민하게 만든 건 "아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하지 않나"하는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아이가 크면 더 힘든 일도 겪을 텐데, 자기 힘으로 정면 돌파할 수 있도록 옆에서 응원해주는 게 엄마의 역할 아닐까. 전학은 문제를 피할 뿐, 아이의 부족한 사회성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아닌데. 학교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전학시킬 거냐는 사람도 있었다. 맞는 말이지만 나보다 소중한 아이의 마음이기에 고민을 거듭했다. 교실 내에서 한번 설정된 암묵적인 힘의 우위는 여간해서는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는 너무 어렸고 한껏 위축된 상태라, 학교에 가서 이렇게 저렇게 해 봐,라고 해서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친구를 기다리기보다는 지금 환경을 바꿔주는 것이 효과적일 거라 결론내렸다. 곧 학교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방학 두 달을 앞두고 과감하게 전학을 감행했다. 유난히 다양성과 포용력을 강조하는 곳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원래 학교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다’는 마음이기도 했다.
시들어가던 아이가 도로 피어나는 데는 불과 2주도 걸리지 않았다. 늘 긴장 상태였던 아이가 편안해지고 웃기 시작했다. 부엌에서 나와 팔이 스쳤다고 “엄마 때문이야!”라며 주저앉아 엉엉 울던 예민한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 아이의 사회성이 불과 일주일 만에 일취월장했을 리는 없다. 어차피 동양인이 없기도 그전 학교나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새 학교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우리 아이를 궁금해하고, 앞다투어 놀자 조르고, 모이는 일이 생길 때마다 초대했다. 처음 받아보는 친절한 대접에 얼떨떨해하던 아이도 빠르게 적응했다. 금세 죽고 못 사는 친구들도 생겼다. 학년이 끝날 때쯤에는 아예 다른 성격 - 유쾌하고 사교적인 - 이 되었다. 한동안 나는 아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지 않은 데 대해 찜찜함을 느꼈지만, 아이도 나름대로 진화한 모습이 보였다. 과거와 다르게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이야기하면서도, 삐치지 않고 대화를 통해 양보하는 법을 배웠다. 과거의 자신처럼,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거나 유독 소극적인 아이들에게 마음을 쓴다. 이제 6학년이 되어 제법 사춘기 감정싸움이 생기기 시작한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는 제법 조정자 역할도 한다.
때로는 정면돌파가 해법이 아닐 수도 있다. 내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당장 싸워서 이겨야만 그 여정이 의미 있는 건 아니다. 한 발짝 물러서서 숨을 고르고 한 바퀴 둘러서 힘을 쌓아 와도 괜찮다. 당장 정면으로 부딪히면 걸려 넘어질 돌부리도, 조금만 힘을 키워 돌아오면 눈치채기도 힘들 정도로 작은 자갈에 불과할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