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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쌤 Jul 31. 2020

저녁 9시, 단식원의 비명소리

먹어본 맛의 위력

삼청동의 단식원에 입소한 적이 있었다.

사실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굴러다니다가, 대학 입학 직전 극적으로 10kg을 빼서 어찌어찌 유지하고 살았다. 하지만 몇 년 후 몸무게가 살금살금 오르자, 당시 '효과 직빵'이라던 단식원에 들어갔다. 특히 연예인들이 많이 다녀갔다는 삼청동의 그곳.

바로 여기다. 사진은 immun360에서 퍼옴.


삼청동에 자주 놀러 다니면서도 처음 보았다 -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현대 미술작품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이 굴뚝을. 주소를 잘못 찾은 건가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여기가 맞았다. 단식원에 왜 굴뚝이? 살을 막 태우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그 위풍당당함에 압도당해 나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원체 유명한 곳이라 화려하진 않아도 최소한 신식(?) 일 줄 알았는데, 뭐랄까, 할머니 따라 달목욕 끊고 다녔을 법한 정겨운 옛날 동네 목욕탕이었다.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나에게 원장님은 벽에 걸린 수많은 연예인들 사진을 보여주며 안심시켰다. 당대 최고의 걸그룹 보컬 옥주현 씨도 있었고, 최근 국제적인 큰 상을 탄 여배우도, 모태 마름 미녀인 줄만 알았던 섹시가수도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입소자들 중에 고도비만은 별로 없고, 대개는 보통에서 통통한 정도의 사람들이었다. 간혹 정말 마른 사람도 있었다. 방은 2인 1실이었는데, 나는 고등학생 골프선수 지망생과 룸메이트가 되어 금세 친해졌다. 단식원에서는 첫날 변비약을 빼고는 물밖에 안 주기 때문에, 남는 시간을 최대한 재미있게 보낼 방법을 찾는 게 관건이다. 그래서 단식원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우리를 삼청공원으로 내보내 한 시간씩 운동을 시켰다. 동네 할머니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대뜸 “건강하고 보기 좋은데 무슨 살을 뺀다 그래.”라고 위로의(?) 말씀을 해 주셨다. 속으로 ‘헉, 단식원에서 온 거 어떻게 아셨지?’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면 사실 통통한 여자 30명이 매일 시간 맞춰 하루 두 번 공원에 몰려오는 모습을 보면 모르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목욕도 하루의 중요한 일과였고, 가끔은 사장님의 목욕탕 인맥을 이용해서 원정도 갔다. “코리아 단식원”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쓰인 버스를 타고 포천의 대형 찜질방으로 원정 가던 날에는, 호기심 왕성한 눈으로 버스 안을 기웃거리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 부끄러웠다.


하루가 아무리 고되고 굴욕적이어도, 단식원 입소자에게 가장 괴로운 시간은 밤 9시였다. 하루 일정을 끝내고 모두 방으로 돌아간 밤. 각 방에서는 “으아~~~~!”, “꺅~~~!” 같은 비명소리가 새어 나왔다. 흡사 줄줄이 늘어선 고문실을 담은 영화처럼. 거의 20년 전이니,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어서 다른 여흥 거리를 찾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모두들 꼼짝없이 각 방의 텔레비전만 바라보고 있는데, 세상에, 난 그렇게 음식이 등장하는 광고가 많은 줄 몰랐다. 그것도 밤 9시, 웬만한 집이라면 저녁 식사도 마쳤을 시간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에릭의 스팸광고. 프라이팬에 자글자글 구운 스팸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 위에 올려 젓가락으로 싸 먹는 에릭은 입소자들에게서 빈 위장만큼이나 울림이 깊은 탄식을 이끌어냈다. 또 하나는 김치냉장고였다. 새빨갛게 익은 김장김치가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메울 때, 옆방에서는 “언니 나 죽어!”라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9시 뉴스가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여지없이 “나 단식원 나가면 제일 먼저 뭐 먹을 거냐면,”으로 시작되는 대화가 꽃을 피웠다. 하긴 항상 대화로만 끝나는 건 아니었다. 옆방 언니 두 명은 종로로 탈출해서 소주에 닭발과 파전을 먹고 원장님께 호되게 혼이 났다.

흰밥에 스팸 한 조각

나의 단식원 여정은 열흘을 채우지 못하고 7일 만에 끝났다. 금세 체중감량을 하기도 했지만, 매일 이렇게 텔레비전 앞에서 박탈감에 시달리느니, 나가서 ‘그 어렵다는 소식’을 하고 말지 싶었다. 예상했겠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다이어트는 현재 진행형이다. 반면 코리아 단식원을 거쳐간 최고의 다이어트 성공자 (비록 단식이 아니라 결국 요가와 건강한 식이라는 정도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옥주현 씨가 남긴 명언이 있다: “먹어봐야 어차피 내가 아는 그 맛.” 다이어트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며 먹고 싶은 마음을 다잡았단다.


어쩌면 그래서 내 다이어트는 아직도 계속되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반박하고 싶어지니 말이다. 다이어트를 할 때 우리를 괴롭게 하는 건 푸아그라나 바클라바처럼 생경한 음식이 아니다. 어쩌다 큰 맘먹어야 한번 가볼 수 있는 비싼 프랑스 식당의 정찬도 아니다.


갓 지은 밥에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스팸을 놓고 올리는 잘 익은 김장김치 한 조각처럼, 눈 감고도 그려지고 혀 끝으로 느껴지는 익숙한 음식들. 몸살로 끙끙 앓던 날 엄마가 끓여준 뽀얀 북엇국, 아빠의 승진 날, 내가 먹고 있는 게 새인지 돼지인지 너무 맛있어서 묻고 싶지 않았던 갈매기살, 겨울에 친구와 팔짱 끼고 지나가면 코를 자극하던 달달한 호떡의 기름내, 엄마랑 백화점 지하 푸드코트에서 먹던 쟁반막국수, 그리고 입가심으로는 괜히 순수한 우유 아이스크림. 아는 맛이니까 그리운 거다.


이번 다이어트도 물건너 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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