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 이상적인 어머니 상, 사랑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사랑, 모성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자연분만으로 낳은 핏덩이 같은 아기가 내 배에 올려졌을 때부터, 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듯 아기를 사랑했다. 그 감정을 모성애라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팔뚝 만한 작은 아기를 조심스레 들어 안고 아이 울음소리에 이리저리 쩔쩔매던 초보 엄마로서의 시간이 막 지났을 때, 둘째를 임신했다. 이것 먹이면 탈이 날까 저것 먹이면 아직 이를까 고민했던 첫째 때와는 달리, 둘째에겐 형아가 먹는 것을 조금 떼어서 줘 보기도 했고, 각종 달달 구리들도 첫째보다는 조금씩 일찍 먹였다. 첫째가 자지러지게 울고 보챘을 때 원인을 몰라 한 번은 병원에 무작정 들고뛰었었는데, 둘째가 울면 패닉이 되기 전 왜 우는지 이유를 먼저 떠올릴 수 있었다. 우유도 안 먹이고 잠도 안 재운 채 낯선 집에 백일 된 아이를 데리고 놀러 갔다가 삼십 분 동안이나 울음을 그치지 않아 친구 가족 앞에서 나도 아이와 함께 울고 말았던 기억은, 둘째 땐 추억이 되었다. 아이를 다루는 게 조금은 능숙해졌을지 모르지만 그보다는, 이 연약한 존재 스스로 잘해나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 것도 있었다. 첫째는 마냥 보호해 주고 사랑해주고 싶은 존재였다면, 둘째는 왠지 조금은 더 기특했다. 아마도 그건 그만큼의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심스러워 애지중지 했던 마음, 한 발짝 떨어져 믿음을 가지고 지켜봤던 마음, 돌이켜 보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같았지만 그 방식은 조금씩 달랐다. 그중 어느 것을 진정한 모성애라 할 수 있을지 나 스스로가 정의 내리기 쉽지 않았다. 방식이 조금 달랐을 뿐인데 아이는 사랑의 크기를 다르게 받아들였을지, 아니면 나에게 둘째에 대한 모성애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을지 헷갈렸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이건 다 유전자가 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유전자를 지키려고 하는 유전자의 명령에서 일어나는 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유전자를 몰빵한 자식에게 더 사랑을 쏟게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특히 한 배에 새끼를 적게 배고 새끼 때 매우 무력한 포유류의 어미들이 모성애가 강하다는 분석도 있다. 모성애가 없다면 새끼의 생존율이 너무 낮아져 도태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진화한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그리고 어미 동물들은 새끼들이 젖을 떼는 시기부터 모성애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다고 한다.
확실히 아무 경험도 없던 초보 엄마 시절, 연약한 신생아를 돌볼 때 엄마로서의 동물적인 본능이 더 많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아기 울음소리에 잠든 눈을 억지로라도 뜰 수 있게 되는 건 엄마로서의 책임감이기도 했지만, 분명 본능이기도 했다. 나 아니면 이 작은 아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머리보다 가슴으로 다가오고, 그런 감정이 모성애일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아이가 스스로 생존할 수 있을 만큼 성장을 했을 땐 어떨까?
근대 사회의 인간에게 최소한의 생존 그 이후의 모성이란 교육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신생아 땐 그저 먹이고, 입히고, 돌보는 최소한의 양육 행위 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그 이후엔 언어, 생활 습관, 심지어 두뇌 계발 등의 영역까지 부모의 몫이 된다.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 모든 면에서 정성을 쏟고 싶은 마음은 모든 부모의 마음이겠지만, 이런 현상은 때론 모성애도 경쟁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대략 1만 년 전부터 농경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자녀는 곧 노동력의 개념으로 인식돼 왔다. 우리 조부모 세대까지만 해도 아이를 낳고 기를 때, 먹이고 입히는 정도에 그치는 아주 최소한의 양육 행위 정도면 충분했다. 즉, 모성애라는 개념은 근대 이후 생겨나기 시작해서 최근 들어서야 엄마들에게 심리적 부담을 안겨주는 개념이 됐다는 것이다. ‘만들어진 모성’의 저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역시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라 근대가 발명한 역사적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모성애의 발명’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이러한 모성애의 개념은 부성애와 달리 엄마에게만 더 강하게 요구된다는 점에서 부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식을 잘 교육시켜서 잘 되도록 하는 의무가 온통 엄마에게만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성공한 자녀를 키운 엄마의 이야기들은 서점과 소셜 네트워크 상에서 회자되고, 훌륭한 아이들 뒤의 엄마들에게 포커스가 맞춰진다.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 어렵게 뒷바라지했던 부모 세대를 지나, 현재는 엄마도 반 교육 전문가가 되어 엄마들 사이에서도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아이를 교육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아이 발달이 좀 뒤처진다거나, 교육에 열심이지 않은 엄마는 모성애가 부족한 것으로 은근히 평가받거나, 스스로 자책하기도 한다. 너무 추상적이어서 잘 와닿지 않을 것만 같은 모성애는 그렇게 우리 곁에 바짝 다가와 있다. 본능이지만 의무인 듯, 아름답지만 부담스러운 듯.
인터넷에서도, 엄마들과의 대화에서도 모성애는 종종 화두로 던져진다. ‘전 모성애가 없나 봐요. 모유 수유가 너무 힘들어요.’ 또는 ‘아기가 울면 짜증부터 나요. 점점 모성애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등 산후 우울증과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 물론,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를 지켜내야 하는 엄마로서의 본능적인 모성애도 분명 존재하지만, 아기의 성장이나 발달 단계에 대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요즘은 감정과 책임감 만으로 무모하게 아기를 돌보지 않는다. 궁금한 건 언제든 가까운 소아과에 가서 물어볼 수 있고, 아이가 잘 크고 있는지 발달 단계별로 영유아 검진도 받아볼 수 있다. 아기는 엄마 품과 함께, 더불어 조금 더 큰 울타리 안의 작은 사회에서 함께 자라게 되는 것이다. 흔히 아이의 성장은 오롯이 엄마에게만 큰 책임이 있고, 엄마로부터 좌우된다고 여겨지지만, 엄마 스스로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셈이다. 우선은 남편도 아빠로서 당연히 육아에 대한 책임이 있고, 산후 조리원도, 가까운 병원도,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그 외 각종 서적과 정보 등 작은 사회로부터의 신뢰와 책임이 오간다. 어쩌면 원론적인 의미의 ‘본능으로서의 모성애’는 점점 희미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던데, 우리 사회는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엄마 한 명에게만 너무 큰 책임과 부담을 지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