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들이 잠든 집은 적막하다. 아이들이 놀며 시끄럽게 떠들 때는 ‘아 제발 조용히 내 시간 좀 가졌으면..’ 싶다가도, 또 홀로 맞는 조용한 밤이 찾아오면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헛헛함이 마음속 가득 그림자처럼 밀려온다. 처음에는 티브이를 틀어놓고 피식피식 웃으며 봤는데, 티브이를 끄면 딱 웃었던 그만큼 또 가라앉았다. 아까운 내 시간을 뺏겨버린 느낌도 들었다. 남편이 늦게 퇴근하는 저녁엔 몸도 고됐지만 마음은 더 고됐다. 어느 날엔가는 잠든 아이들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거실로 나와 식탁에 앉아 혼자 찔끔찔끔 울었다. 마음이 조금 가라앉은 날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대충 씻고 일찍 잠이나 자자고 생각했지만 그런 날은 오히려 침대에 누워서도 말똥말똥, 괴로움에 각성된 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의 이성은 ‘아까운 시간에 중국어 공부라도 해야지.’라고 외쳤고 그 외 나의 정신은 이성을 비웃었다. 몸의 모든 에너지가 다 빠져나간 밤의 시간에는 제대로 사고란 걸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또 어느 날 밤엔, 냉장고 속에 있는 맥주 한 캔을 떠올리고는 혼자 안주도 없이 맥주를 마셨다. 술이 약한 건 아니지만 좋아하진 않는다. 더군다나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신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는 술을 마시다 눈에서 나온 눈물이 코로 입으로 흘러 눈물인지 콧물 인지도 모르게 뒤범벅이 된 채로 울었다. 그리고 그때, 식탁 맞은편에 있는 현관문이 끼익 하고 열리며 늦은 밤 퇴근하는 남편의 반쯤 감긴 눈과 나의 충혈된 눈이 딱 마주쳤다. 소매로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찐득한 것을 훔치는 사이, 남편이 냉장고 속에 남은 맥주 한 캔을 더 가지고 와서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왜 그러는 거야?”
“왜 그러는 거냐니?”
‘왜 그래’가 아닌 ‘왜 그러는 거냐’는 말에 감정이 날카로워졌다. 남편에게 쏘아붙이고는 한국어의 어미 조사를 탓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향해 쏟아붓고 싶었던 날카로운 감정은 곧 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으로 돌아왔다.
그날 오후,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아이들에게 요구르트를 주려고 보니 빨대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뚜껑의 껍질을 반 정도만 까서 주며 “조심히 앉아서 마셔~”라고 말하고는 잠깐 부엌에 다녀왔다. 그 잠깐 사이 또 “엄마아~” 하고 부르길래 가보니 요구르트가 이미 바닥에 흥건하게 흘러나와 있었다.
“아휴, 엄마가 앉아서 마시랬잖아!.” (인상 팍 쓰며)
열심히 바닥을 다 닦고 일어나려는 찰나 매트 위에 앉아있던 둘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앉은자리 옆에는 반쯤 남긴 요구르트 병이 엎어져 있었고, 꿀럭 꿀럭 흘러나온 살구빛 액체가 하얀 매트의 틈 사이를 소리 없이 적시고 있었다. 닦으려고 다가가 봤을 땐 이미 끝물이었다. 매트 틈과 바닥 사이로까지 흥건해진 요구르트는 찐득하게 묻어 나왔다. 나는 결국 손에 쥔 걸레를 내던지며 버럭하고 말았다.
“한 번에 다 마셔야지!” (원샷하라는 말은 한 적이 없었음에도)
“흘리면 바로 말했었어야지!” (둘째 아이는 두 돌 반이 넘도록 말이 서툴렀음에도)
그리고는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아아아아~!!!!”라고 포효한 뒤 (말 그대로 포효) “엄마 힘들게 닦고 있는 거 안 보여? 너네가 닦아!”라고 소리 지르고는 쿵쾅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조용해서 나와 보니 첫째가 빨개진 눈을 하고 바닥을 문지르고 있었고 둘째는 작은 손에 휴지 조각을 움켜쥐고는 형아가 하는 모양새를 따라 열심히 바닥을 훔치고 있었다. 요구르트를 잔뜩 머금은 물컹한 휴지조각이 설상가상이긴 했지만, 그 모습을 본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착한 아이들에게 나는 방금 전 뭘 한 거지?’
“엄마가 아까 소리 질러서 미안해. 엄마가 먼저 식탁이나 테이블 위에 앉혀줬어야 하는 건데..”
라는 말로 사과하고 나머지의 시간들은 웃고 보냈지만 괴로움에 가까운 자책감은 쉽게 사라지지가 않았다. 사실 빨대를 안 준건 나였고 앉아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식탁이나 탁자 앞에 앉히기 번거로워 앉은 그 자리에서 먹으라고 준 것도 나였다.
고백하자면 나는 육아에 자신 있었다. 드러내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은 세상 그 어떤 일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라 여겼다. 잘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 아이 키우는 일이라도 잘해야지 싶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아이들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아이들과의 케미도 남다르다고 내심 자부했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버럭 할 땐 마치 육아 전문가라도 되는 양 훈수를 뒀고, 감정 조절 능력이나 인내심 하나만큼은 내 것이었다. 괴로워하면서도 이게 진짜 아이들에 대한 미안한 감정인지 아니면,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 덧씌워놓은 ‘좋은 엄마’ 상에 위배되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몹쓸 자기 비하가 또 도지기 시작했다.
모든 걸 털어놓은 나에게 남편이 말했다.
“딱 보고 아이들 일일 줄 알았어. 네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건 꼭 아이들 일이더라. 괜찮아.”
그랬다.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녹록지 않았고, 아이들이 맞닥뜨리는 일들은 (맞닥뜨리지 않아도 될 일들은) 종종 하염없이 가슴 아팠다. 그래서 엄마인 나까지 더해 아이들에게 힘든 감정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이 40이 다 되어 이제 그렇게 아픈 일은 없다고 여겼는데 자식 일은 달랐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말은, 네 존재 앞에서 나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너의 작은 아픔도 부모에겐 고통이 된다.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러할 것이고 우리 엄마 아빠도 그랬을 것이다. 어렸을 때 시골에 갔다가 열이 심하게 났을 때, 부모님은 나를 업고 시내까지 뛰었다고 했다. 나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세상에 있는.. 부모란 그런 사람이다.
이십 대 후반 즈음부터, 나에겐 항상 내가 먼저였다. 나를 제쳐뒀던 시간들이 나를 잠식해 간다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도, 서점에 가도, 나를 찾는 운동이라도 열린 마냥 모두가 ‘나’를 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봐도 때론 바보 같던 난 좀 더 이기적일 필요가 있었던 한편, 그건 살기 위해 나를 찾아야만 하는 시간들이기도 했다. 결혼도, 아이를 갖는 것도,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모두 나 잘 살자고 하는 일이었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아픔보다 너의 아픔이 더 크게 다가왔을 때 알게 되었다. 누군가 내 감정을 먼저 알아주기만을 바랬던 내가, 나만 힘들다고 생각했었던 이기적인 내가, 나 아닌 다른 존재의 감정을 느끼고 아파하고 있었다. 나 스스로 나를 바라볼 때면 한없이 관대해졌지만, 너의 눈으로 나를 바라볼 때면 나 자신을 쉽게 기만할 수가 없었다. 또한 네가 나만큼, 때론 나보다 더 중요한 존재라는 느낌은 네가 나와 연결된 분신이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반대로 아이보다 내가 더 우선이 되면 아이를 나의 분신같이 여기기 쉽다.) 아이가 나와 닮았으니까, 내 자식이니까 귀하다고 여기기 쉽지만, 아이는 나보다 더 소중한 또 하나의 존재이기에 귀했다. 궁극적으로 그 작은 깨달음은 아이의 존재를 보다 독립적으로 인식하게 함과 동시에 타인의 존재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엄마가 되고 나서 겪은 또 하나의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