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태어나 처음 내 배 위에 올려졌을 때, 그때의 감정을 떠올려보면, 그건 사랑보단 경이에 가까웠다. 못생겼지만 예뻤고,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으며, 놀랐지만 안도했다. 첫째를 임신했을 때, 나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먹든 뱃속에 있는 아기를 저절로 의식했고 혼자일 때도 혼자가 아닌 느낌이 들었다. 태교를 한다고 미리 동화책을 사서 읽기도 했고 남편과 우리 중 누구를 더 많이 닮았을까 하는 이야기들로 시시덕대기도 했다. 알게 모르게, 뱃속의 아이와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셈이었고 그 후의 만남은 순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아기의 눈동자가 점점 또렷해질 때마다, 작은 손과 발이 눈에 띄게 자랄 때마다, 예쁜 구석은 하나둘씩 더 늘어갔다.
하지만, 두 살 터울로, 정확히 23개월 터울 차이로 태어난 둘째에 대한 감정은 좀 달랐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첫째는 돌을 갓 넘긴 때였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기를 데리고 돌아다니고, 삼시 세끼와 간식을 챙기는 일은 배가 불러올수록 버거웠다. 하루가 그야말로 정신없이 흘러가는데 태교는 꿈이었다. 첫째의 열 달은 한없이 더뎠는데, 둘째의 열 달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첫째의 목소리와 동요를 태교라 여기며 미안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르는 그 정도가 태교의 전부였다. 똑같이 열 달을 뱄어도 함께 나눈 시간의 양과 질이 달랐다. 그렇게 태어난 둘째는 잠도 먹는 것도 까탈스럽지 않았다. 큰 반달눈에, 얼굴을 가득 채우는 환한 미소까지, 누가 봐도 예쁜 아이였기에 예뻤다.
중국에서 보모 아줌마는 훨씬 비용이 저렴했고, 아줌마를 쓰면 아이가 어릴 때부터 중국어에 노출되니 일석 이조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생후 50일쯤 아이를 데리고 중국으로 들어왔을 때, 둘째는 보모 아줌마에게 맡기기 시작했고 그때 모유 수유도 중단하게 되었다. 아직 기관에 다니지 않는 첫째는 주로 내가 돌봤고 둘째에게 한참 질투하던 첫째는 점점 엄마 껌딱지가 되어갔다. 아줌마는 둘째를 많이 예뻐해 주셨고 그럴수록 둘째도 아줌마를 잘 따랐다. 전쟁 같던 시기가 지나고 모든 게 순조로워졌다고 여길 때쯤이었다. 둘째가 7개월 정도 됐을 때,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잠시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둘째의 반응이 컸다. 그냥 낯가림이라고 하기엔 너무 불안정했다. 한 번 울면 그칠 줄을 몰라 몇 번이나 집안이 뒤집어지곤 했다. 주 양육자였던 아줌마가 갑자기 사라진 데다가 환경도 바뀌었으니, 아이에겐 당연히 감당하기 힘든 변화였던 것이다. 한 달 여간 한국에 있으며, 아이는 다시 조금씩 안정을 찾았고 할머니 할아버지와도 친해지게 되었지만,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 또 짧은 이별을 겪게 될 아이가 많이 안쓰러웠다. 중국에 살며 도시를 옮겨 다닐 수도 있고 언젠가 한국으로 들어가게 될 수도 있는데, 앞으로 더 많은 이별을 겪을 수밖에 없는 아이가 눈에 선했다. 그래서 한 달 뒤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 보모 아줌마를 쓰지 않기로 결정했고 아이 둘을 혼자 집에서 돌보기 시작했다. 엄마를 뺏긴 것 같은 첫째의 마음도, 엄마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둘째의 마음도 함께 품어보기로..
엄마 한 명이 3살, 1살 남자아이 둘을 온종일 돌본다는 건, 매일 어떤 기록을 경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한 명이 울면 또 한 명이 따라 울고, 한 명이 장난 치면 또 한 명이 합류했다. 하지만 기록을 경신하는 만큼 아는 것이 늘어갔다. 이를테면, 첫째는 손을 뿌리치고 가는 걸 좋아하는데 둘째는 손을 잡고 가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 첫째는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고, 둘째는 하나를 알려주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사실, 첫째는 말을 잘 따라 하는데
둘째는 노래를 잘 따라 부른다는 사실, 첫째는 물을 새처럼 한 모금 먹고 내려놓는데 둘째는 항상 하마처럼 원샷을 해서 물을 마실 때 귀여운 아랫입술이 보인다는 사실. 들여다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네 안의 보석들이라 확신한다. 꺼내 주지 않으면 아무도 몰랐을 반짝임이다. 무엇보다 둘째는 예뻐서 당연히 예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예쁘게 보니까 예쁜 거였다.
예쁨은 가끔 구석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기에, 예쁜 구석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구석에 있는 예쁨을 보아줄 줄 아는 마음, 함께 한 시간들이 늘어갈수록 그때의 우리가 차곡차곡 쌓여 단단해지는 마음, 그래서 네 온몸이 가시투성이라 해도 단단해진 마음으로 안아줄 수 있는 사람, 엄마.
그게 내가 아는 너희에 대한 사랑이다.